본문 바로가기

프로방스 소설쓰기

따로 또 같이 프로방스를 걷다 12회

 

 

<12>

 

미양이 아이스크림을 떠먹으며 데니를 바라보았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엄마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행복하다는 얼굴이었다.

엄마가 런던으로 여행을 왔다가 지갑을 잃어버리셨대. 레스토랑에서 저녁값을 계산하려다가 지갑이 없는 걸 알게 된 거야.”

부모의 첫 만남을 설명하는 데니의 표정이 환하게 빛났다. 그다음은 뻔한 스토리였다. 음식값을 치르지 못해 쩔쩔매는 엄마를 대신해서 아빠가 계산했고, 엄마는 신세를 지는 김에 호텔비까지 내달라고 뻔뻔한 제안을 했다는 거였다. 엄마의 나머지 여행을 책임진 아빠는 빚을 받는다는 핑계로 프랑스로 놀러 왔고, 그 길로 눌러앉았다고 했다.

그게 가능한 일이야?”

미양은 이해가 안 됐다.

불가능할 것도 없지. 두 분 다 성인인데.”

가족들이 반대는 안 했고?”

, 약간. 아빠네 집안이 대단했거든. 근데 쉽게 허락을 받았대

어떻게?”

엄마랑 결혼하면 날씨 좋은 프로방스에서 살 수 있다고 했더니, 금방 오케이 하셨대.”

그게 무슨 말이야?”프로방스는 영국인들에게 로망의 땅이거든.”

미양은 데니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도 그냥 들었다. 흡족한 그의 미소가 좋았고 엄마를 추억할 때마다 짓던 그의 환한 웃음을 보고 싶어서였다.

 

사랑을 찾아 프로방스에 정착한 데니 아빠는 우선 프랑스어 공부를 시작했다. 그사이 엄마는 의대를 졸업하고 엑상프로방스 시내에 조그만 사무실을 얻어서 개업했다. 신경외과 전문의가 되고 싶었지만, 데니의 형을 임신하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꿈을 버리고 일반의가 되었다.

데니 아빠는 영국과 프랑스를 오가며 사업을 했다. 튼튼한 자본에 뛰어난 사업수완이 더해져서 사업은 나날이 번창했다.

 

엄마랑 난 생일이 같아.”

데니의 형이 아빠를 닮았다면 데니는 엄마 판박이였다. 외모는 물론이고 내면적인 모든 것이 흡사 소울메이트처럼 닮았다. 어린 시절 데니는 엄마와 자신은 한몸일 거라는 생각도 했다. 그에게 엄마는 세상 전부였다.

그런 엄마가 미라보 거리에서 음주운전차에 치여 돌아가셨다. 엄마가 용기를 내서 한국에 사는 가족들을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데니는 세상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없는 세상은 살아야 할 이유와 의미가 없었다.

 

그런데 살아지더라. 엄마가 없어도 나는 숨을 쉬고 밥을 먹고 있더라. 세상도 그래. 엄마가 사라졌는데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잘 돌아가고 있더라고.”

 

데니의 눈 주위가 붉어졌다. 미양은 말없이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형도 6개월 전에 영국으로 떠났어. 더는 엄마의 부재를 견딜 수 없었나 봐.”

미양은 침울해지는 데니의 눈을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할 수만 있다면 그에게 씌워진 슬픔의 더께를 모두 벗겨내고 싶었다. 그의 아픔을 나누어 갖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냥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뿐이었다.

다시 데니의 전화가 걸려온 것은 12월 말. 겨울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햇볕이 따뜻한 날이었다. 아침 일찍 엄마와 아버지는 니스로 결혼기념 여행을 떠났고, 미양은 개학 후에 있을 시험공부를 하고 있었다.

데니는 엄마 이야기에 목말라 있었다. 미양은 반가운 친구에게 온 편지를 받아든 기분으로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사고 이후 가족이 겪은 불행부터 그의 엄마가 자신을 버린 나라를 미워하면서도 그리워했었다는 것까지 남김없이 들었다.

 

데니의 눈가가 자꾸 촉촉해졌다. 그의 마음을 어루만져줄 따뜻한 말이 필요했다. 특별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형식적인 인사, 아이 엠 쏘리만 반복했다. 그녀가 미안한 일은 아닌데, 그 말밖에 할 수 없는 자신이 한심했다.

그때, 문득 그에게 따뜻한 밥을 지어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미양의 깊은 곳에 숨어있던 모성애가 피어오른 것 같다. 마침 엄마가 여행을 가며 만들어 놓은 밑반찬들도 떠올랐다.

우리 집에 가서 저녁 먹을래?”

데니는 미양의 즉흥적인 제안에 당황했다.

집에서 저녁을 먹자고?”

자신의 귀를 의심하듯 다시 한 번 미양의 저녁초대를 확인했다. 어마어마한 퍼즐 조각 앞에 선 아이처럼 심란한 표정도 지었다.

미양은 데니가 저녁을 먹자는 말에 왜 그렇게 놀라고 당황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계속해서 정말 괜찮겠냐고 물었다. 미양은 정말 괜찮다는 뜻으로 그의 손을 꼭 잡고 살짝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미양을 바라보는 데니의 눈빛이 흔들렸다.

오후 햇살이 꼬리를 감추기 시작했다. 거리를 장식한 조명이 일제히 불을 밝혔다. 도시는 곱게 화장을 한 여인처럼 성숙해졌다. 무언가 고백을 하기에 좋은 시간이었다.

 

미양은 그에게 밥상을 차려줄 생각에 들떴다.

냉장고에 가득한 반찬 덕분에 상차림이 쉬웠다. 미양은 쌀을 씻어서 따뜻하게 밥을 짓고, 국을 끓이고 엄마에게 배운 새우요리와 치즈를 듬뿍 넣은 계란말이를 만들었다.

데니는 식탁에 앉아 능숙하게 요리하는 미양을 바라보았다. 요리하는 미양의 얼굴이 새색시처럼 붉어졌다.

, 굉장한 요리사 같다.”

하하 폼은 그럴듯하지? 그렇지만 맛은 장담 못 해.”

내가 만든 음식을 데니가 좋아할까.’ 미양은 아까부터 그것이 걱정이었다. 다행히 데니는 음식을 맛있게 잘 먹었다. 저녁을 먹는 내내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데니는 서툰 젓가락질로 반찬들을 집어 올리며 소풍을 나온 아이처럼 즐거워했다. 후식으로 초콜릿 케이크까지 먹자 배를 두드리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창밖의 어둠이 짙어졌다. 디저트 접시를 치우기 무섭게 데니가 미양에게 다가왔다. 그의 숨소리가 불규칙하게 떨렸다. 미양은 왕자의 키스를 기다리며 잠든 숲 속의 공주처럼 눈을 감았다. 그의 슬픈 영혼을 위로해 줄, 아름다운 키스를 선물하고 싶었다. 두 사람은 처음에는 가볍게 그러나 조금씩 더 깊고 부드럽게 키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