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일의 계절
세일의 계절
매년 1월과 7월. 프랑스사람들은 지갑을 열 준비를 한다. 알뜰주부들은 미리미리 살
물건들을 적어놓고, 목 빠지게 그날을 기다린다. 바로 일년에 두 번 있는 세일 날을...
프랑스에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나 역시 그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꼭 필요한 테팔 전기주전자도 세일하면 사야지, 하면서 꾹꾹 참고 기다렸었다. 결국 테팔주전자는
세일을 안 한다는 것을 알고 실망 했지만 옷값은 달랐다. 세일가격이 정말 파격적이었다.
지난 3년 간, 여섯 번의 세일을 거치면서 나는 세일에 대처하는 현명한 자세를 터득했다.
꼭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세일 첫날부터 출동해야지만 그렇지 않으면 마지막 세일까지 느긋하게 기다려야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이다.(프랑스세일은 일주일씩 세 단계로 나뉜다. 첫 주는 50%, 둘째 주부터는 60%,
셋째 주부터 마지막까지는 70~90%까지 마구마구 할인된다) 그렇다. 프랑스에서 세일은 돈을 쓰면서 돈을
버는 방법이다. 어차피 인간은 소비적인 동물이다. 또 소비를 해야 경제가 돌아간다. 기왕 소비를 할 거면
소비자는 싼 값에 물건을 사서 좋고, 생산자와 판매자는 물건이 재고로 남지 않아서 좋은 것이 바로 세일이다.
올 겨울세일은 1월 12일에 시작됐다. 세일 첫날, 이른 아침부터 매장 앞에서 줄을 설 것도 아니면서
제니와 약속을 잡았다. 나의 쇼핑단짝친구 선옥씨에게 살짝 미안했지만 제니가 오늘밖에 시간이 없다니
어쩔 수 없다. 간호사 제니는 쉬는 날이 불규칙하다. 주말에 일을 할 때가 많아서 주중에 쉴 때가 많다.
일이 피곤할 텐데, 그녀는 시간이 날 때마다 만나자는 전화를 건다. 우정을 유지하려는 그녀의
눈물겨운 노력덕분에 우리는 무려 스무 살이나 되는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절친이 되었다.
여자들은 함께 쇼핑을 할 친구가 있다는 사실 하나로도 행복해진다.
그녀와 함께 엑스시내를 갈고 다니며 옷가게, 그릇가게, 가구점을 섭렵한다.
매장마다 큼직하게 써 붙인 ‘Les soldes', 세일 중이라는 단어가 축제를 알리는 팡파르 같다.
벌써 세 시간째다...아직 이거다! 싶은 물건을 만나지 못했는데 다리가 뻐근뻐근 허리가 찌릿찌릿해온다.
카페에서 커피를 마셔야 할 타임이다. 진한 에스프레소 한잔으로 피로를 풀고 2차 쇼핑에 돌입한다.
전의를 다지듯 입술을 앙다문다. 젊은 제니덕분에 쇼핑 폭이 넓어졌다. 평소에 그냥 지나쳤던
캐주얼매장에서 젊은 옷들을 들었다놓았다하면서 쇼핑을 즐긴다.
제니가 좋아하는 브랜드, 내가 선호하는 옷가게를 차례로 돌던 우리의 발걸음이 ‘자라’로 향한다.
세상에...매장 안이 도떼기시장이다. 취향대로 옷을 고르던 제니가 먼저 지친다. 내가 고른 블라우스가
예쁘다며 칭찬을 해주는데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다. 블라우스를 입어보고, 계산까지 하려면 30분 아니
한 시간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다. 할 수 없다. 먼저 들어가라고...눈물이 그렁그렁하게 하품을 하는
제니의 등을 떠민다. 정겨운 비주를 나눈 뒤, 그녀가 총총히 매장을 떠난다.
나는 얼른 내 진짜 쇼핑친구 선옥씨에게 전화를 건다. 벌써 몇 군데 매장을 돌면서 쇼핑을 했다는
그녀와 약속을 잡고 나니 마음이 급해진다. 나는 블라우스를 입어보지도 않고 계산을 한다.
오라는 곳은 없지만 갈 곳은 너무 많다. 그치? 세일의 계절이 돌아올 때마다 우리가 되풀이하는 말이다.
3년 전, 프랑스로 오면서... 짐정리를 한답시고 수많은 옷들을 버리면서 다시는 쓸데없이 옷을 사지 않겠다고
다짐에 다짐을 했었다. 그런데 가격이 반값으로 아니 칠십, 팔십 퍼센트로 떨어지는 세일이 시작되자 조바심이
일기 시작했다. 땡 처리하는 것도 아니고 며칠 전까지 버젓이 매장에 걸려있던 옷들이었다. 값이 이렇게 싼데,
쇼핑을 안 한다면 바보소리를 들을 것 같았다. 세일할 때 물건을 싸게 사서 쓰는 프랑스인들의 지혜도 배워야
할 것 같았다. 쇼핑이 곧 돈을 버는 거라는 논리를 내세우며 나는 세일의 유혹 속으로 빠져들었다.
변명 같지만 나의 세일 쇼핑은 정말 알뜰살뜰 가정경제를 돕는 행위다. 간혹 세일을 빙자해서 충동구매를
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꼭 필요한 물건을 싼 값에 사서 가계부를 두둑하게 해 주었다. 세일기간 중에
가족이나 친구들의 선물을 사서 선물비용의 50%를 절약할 수 있었고, 세일 할 때만 옷을 사다보니
한국에서보다 훨씬 싼값에 옷을 사 입을 수 있었다. 제일 좋은 점은 세일덕분에 내가 행복해 질 수 있었다는 거다.
나의 쇼핑은 소박하다. 명품을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닌지라 주로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 한국에서 살 때보다
싸게 살 수 있는 물건들만 구입한다.
작년 여름이었던가. 세일 3번째 주에 선옥씨랑 쇼핑을 나갔다가 마음에 쏙 드는 물건들을 구입했다.
거의가 80% 이상 세일 된 가격이었다. 양 손에 쇼핑백을 가득 들었는데, 우리의 지출금액이 40유로,
6만원을 넘지 않았다. 어찌나 좋았던지 우리 입이 저절로 찢어졌다. 정상가격으로 샀다면 도대체
이게 얼마나 될지 계산도 안 됐다. 명품을 샀을 때보다 몇 배는 더 행복했다. 발품을 팔며 세일을
찾아다닌 보람이 느껴지면서 가슴이 뿌듯해지고 저절로 입이 귀에 걸렸다. 소박한 행복이 정말 달콤했다.
이번 겨울 세일에서도 수확이 많았다. 내가 세일기간에 부지런히 쇼핑을 해서 절약을 많이 했다고 뻐기자
남편이 기막히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내가 생각해도 논리적으로 안 맞는다. 그래도 억지논리를 펴 본다.
나는 지금 세계경제의 흐름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 쇼핑을 한 거고, 100유로짜리를 30유로에 샀으니까
70유로를 번거라고 빡빡 우겨댄다. 남편이 한 마디 거든다.
"왜? 그렇게 돈을 더 벌고 싶으면 1천 유로짜리를 3백 유로에 사지 그러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