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불던 날의 북 카페
바람 불던 날의 북 카페
겨울이 희미하게 저물던 날, 60살 소녀 데보라를 만났다.
다소 순해진 미스트랄이 꾸흐 미하보를 떠돈다. 그 뒤를 여린 봄이 살금살금
뒤따르지만 어림도 없다. 미스트랄의 입김은 아직 차갑고 추위도 스산하다.
춥지 않니? 참 이상해. 분명히 이곳 기온이 내 고향 필라델피아보다 높은데...
이론대로라면 춥지 않아야 하는데... 나 지금 너무 추워. 너도 그러니?
그치? 너도 그렇게 느끼는구나? 나도 프로방스에서 겨울을 날 때마다
똑같은 생각을 했었어. 솔직히 한국이 더 춥지만 여기서도 추운 건 마찬가지야.
미스트랄이 다시 거친 숨을 몰아쉰다. 데보라가 슬며시 나를 바라본다.
이런 날, 꼭 가고 싶은 곳이 있는데... 같이 갈래? 어쩜 너도 아는 곳일지도 몰라.
데보라를 따라 들어선 곳은 미하보 거리를 산책하면서도 그냥 지나쳤던 길이다.
데보라가 길 왼쪽으로 빨간 창틀이 아기자기한 북 카페를 가리킨다.
여기는 내가 프랑스어교재들을 사는 곳이야. 저 안에 세계 각국의 책들이 있어.
아마, 한국책도 있을 걸?
데보라는 카페지기와 정겹게 인사를 나눈 뒤, 나를 소개한다. 그리고 카페에 한국책도 있느냐고
묻는다. 카페지기가 찾아 준 책은 세 권. 프랑스인이 쓴 한국에 관한 책들이다. 카페 안에는
한국어공부를 위한 교재도 있다. 그런데 너무 어렵다. 중국 한시를 우리말로 해석해 놓고,
그것을 다시 프랑스어로 번역, 설명해 놓았다. 이 책을 통해서 처음 한국과 만난 프랑스인이라면
한국어를 배우겠다는 생각은 죽어도 안 할 것 같다.
서점 안쪽에 있는 카페는 한산하다. 별로 커피나 차를 마시고 싶은 분위기가 아니다.
이런 내 마음을 눈치 챈 데보라가 가만히 내 손을 잡아끈다.
(또 다른 북 카페로 가는 길에 만난 학교. 초등학생들에게 음악과 무용을 전문으로 가르치는
예술학교다. 오래된 학교 건물위로 프로방스 하늘이 투명하게 빛나고 있다.)
한 10미터쯤 걸었을까? 골목 끝에 작은 바가 보인다. ‘영어책방-카페’라는 간판처럼 영어책을
전문으로 파는 서점이란다. 카페 문을 여는 순간, 뎅그렁 종소리와 함께 포근하고 따뜻한
기운이 나를 감싼다. 동시에 막 프랑스국경을 넘어서고 있는 느낌에 사로잡힌다.
카페는 달콤한 핫초콜릿과 시나몬 향으로 가득하다.
사각사각 책 넘기는 소리와 함께 소곤거리는 소리, 사람들의 정겨운 웃음이 들려온다.
책 사이에 앉아 노트북을 토닥거리는 금발머리의 안경이 반짝 빛난다.
마음에 드니? 여기는 내 향수병을 달래주는 곳이야. 고향생각에 우울해지는 날,
난 이곳을 찾아와. 핫초콜릿을 주문하고 저 테이블에 앉아서 우리 신문을 읽어.
그러면 내가 고향으로 돌아온 것 같은 안도감이 느껴져서 참 좋아.
나이 들어서 고향을 떠난다는 일은 더 힘들단다. 새롭게 시작된 프로방스 생활의
설레임보다 떠나온 고향에 대한 향수가 더 크기 때문이란다.
늘 씩씩해 보였는데, 이순(耳順)에 새로 시작하는 삶이 너무 행복해서 들떠 보였는데,
그게 아니었나보다.
(프로방스 스케치북. 표지그림은 아름답기로 유명한 고흐드 마을같다.)
오늘 그녀는 핫초콜릿 대신 커피를 주문한다. 친구와 함께 온 즐거운 날에는 커피가 더 어울린단다.
우리는 북 카페에서 읽고 싶은 책을 가져다가 뒤적거린다. 데보라가 남편에게 선물할 책을 보여준다.
‘프로방스 스케치북’. 작가가 그린 프로방스 마을과 글이 다정하게 어우러진 책이다.
내가 평소에 꿈꾸던 책, 나도 그림만 잘 그릴 수 있다면 꼭 만들어보고 싶은 책이다.
영어책에 집중을 못하는 나를 위해서 데보라가 수다주머니를 살짝 연다.
예술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쳤던 그녀는 아직도 생생한 현역이다.
두 아들의 대학등록금을 책임지느라 노후자금이 바닥났어도 행복하단다.
(입양한 둘째아들이 명문 아이비리그출신이라 등록금부담이 훨씬 컸지만 대출을
받지 않겠다는 부부의 교육신념으로 그동안 저금한 돈을 다 쏟아 부었단다.)
은퇴할 나이의 그녀남편이 프로방스에서 다시 일을 시작하게 됐으니
이런 행운이 또 어디 있겠느냐며 살며시 웃는다.
그녀와 함께 커피를 마시며 책들을 둘러본다. 책 향기가 내 몸으로 스며든다.
갑자기 이런 공간을 가진 그녀가 부러워진다. 프로방스 속의 한국을, 한국책들을
가질 수 없는 우리가 쓸쓸해진다. 창밖의 미스트랄이 더 스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