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방스 소설쓰기

따로 또 같이 프로방스를 걷다 6회

비올렛뜨 2015. 5. 18. 12:12

 

<6>

수업은 첫날부터 험난했다.

자신을 마담 프랑스와라고 소개한 수학교사는 영어와 프랑스어를 번갈아 쓰면서 공부를 가르쳤다. 똑똑 하이힐 소리처럼 끊어지는 마담의 영국식 영어는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다. 콧소리가 강한 프랑스어는 윙윙거리는 소음처럼 들렸다.

언제 뒤집힐지 모를 낡은 조각배에 몸을 싣고 해무가 자욱한 바다를 건너는 것 같았다. 멍하니 앉아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쏟아내고 있는 마담 프랑스와의 입을 바라보는데 핑하니 눈물이 솟았다. 속이 메스꺼워지고 멀미도 일었다. 당장 토할 것 같이 어지러웠다. 정신이 몽롱했다. 겨우 1교시 수업이 끝났는데 미양은 탈진해서 쓰러질 지경이었다. 부르르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책상을 부여잡는데 여자아이들 몇 명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뛰 에 쉬누아즈? 자뽀네즈?”

 

그들이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미양은 절망에 차서 그들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난 너희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영어로 하려던 이 말도 입안에서만 맴돌았다. 갑자기 뇌세포가 파괴되어 머릿속에 저장된 것들이 지워진 느낌이었다. 핑그르르 이슬처럼 눈물이 맺히는데 영국식 영어가 천천히 그리고 또렷하게 들렸다.

 

네가 중국인인지 일본인인지 묻고 있는 거야.”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 미양은 대리석을 조각해 놓은 것처럼 잘생긴 얼굴과 마주쳤다. 부드러운 갈색 머리에 창백할 정도로 흰 피부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동양적인 분위기가 느껴지는 남자가 그녀를 무심한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에서 왠지 모를 슬픔이 묻어났다.

 

한국에서 왔어.”

미양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 그의 얼굴에 반가움이 스쳤다.

사우스? 노스?”

미양은 왜 이런 질문을 받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사우스라고 대답했다. 그는 아! 그렇군, 하는 표정으로 잠깐 그녀를 바라보았다. 순간 교실이 조용해졌다.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자리로 돌아갔다.

, 데니랑 아는 사이니?”

뒤이어 익숙한 미국식 영어가 들렸다.

데니가 누군데?”

몰라? 방금 너랑 이야기한 아이 말이야.”

주근깨투성이 빨간 머리가 미양에게 다가왔다. 로잘린이었다.

정말 데니를 모르는구나.”

잔뜩 긴장됐던 로잘린의 표정이 풀어졌다. 흘끔 데니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 그를 향한 사랑이 비쳤다. 미양은 로잘린에게서 짝사랑의 아픔이 느껴졌다.

, 데니를 좋아하는구나?”

미양의 말에 로잘린이 쓸쓸하게 웃었다.

들켰네? 모르는 척 해줄 거지?”

로잘린은 오랜 친구처럼 미양에게 다가왔다. 미양도 그런 그녀가 싫지 않았다.

 

그날 이후, 미양은 로잘린과 친해졌다. 로잘린은 자신의 짝사랑을 털어놓고 위로받을 누군가가 필요했고, 미양은 그 역할에 충실했다. 대신 로잘린은 미양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쳐주고 친구들 사이의 가교역할도 해주었다.

로잘린은 쉬지 않고 데니 이야기를 했다. 주로 데니와 관련된 가십이었다. 데니에게 데이트 신청을 했다가 거절당한 여자들 이야기를 할 때, 로잘린의 입꼬리가 기분 좋게 올라가기도 했다.

 

정말 가슴이 뛸 정도로 잘 생기지 않았니? 데니는 영어와 프랑스어도 완벽하게 하고 공부도 일등이야. 아마, 우리 반 아이들 모두 그를 좋아할 걸?”

그랬다. 프랑스어를 모르는 미양도 반 아이들이 틈날 때마다, 데니 이야기를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스페인에서 온 소피아는 대놓고 그녀의 사랑을 표현했다. 빚쟁이처럼 데니 주변을 맴돌며 그의 사랑을 갈구하는 것 같았다.

난 쟤가 정말 싫어.”

로잘린은 진저리 치며 소피아를 싫어했다.

소피아랑 데니, 아빠들끼리 친구래. 그걸 핑계로 소피아가 데니 옆에 앉아서 저러는 거지. 어유, 꼴 보기 싫어.”

다행히 데니는 소피아에게 살갑지 않았다.

만약 데니가 소피아랑 사귄다면 난 학교를 그만둘 거야.”

말은 이렇게 해도 로잘린은 소피아와 친하게 지냈다. 적과 동침이었다. 데니를 좋아하는 여자들과 친하게 지내야 그들을 경계할 수 있다고 했다. 미양은 그녀의 사랑이 섬뜩해졌다. 14살 소녀의 사랑이 그렇게 치밀하고 계산적이라니.

 

데니가 살짝 건방져 보여도 기품이 넘쳐 보이지? 왜 그런지 아니?”

……

그건, 데니 아빠가 영국 귀족 출신이라서 그래. 그러니까 데니도 귀족인 셈이지.”

엄마는?”

프랑스사람이라는데, 자세한 건 몰라.”

근데, 좀 외로워 보여.”

! 그건 우리 탓이야. 우리 수준이 너무 낮아서 고귀하고 지적인 그의 상대가 못 되기 때문이지.”

에이. 그건 억지다. 데니가 수준이 높으면 얼마나 높다고

, 데니가 얼마나 똑똑한지 모르는구나? ! 쟤가 읽고 있는 책. 대학생들도 어려워서 쩔쩔매는 책인걸?”

 

미양은 나무그늘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데니를 흘끔 쳐다보았다. 한 줄기 바람이 그녀의 등을 스치며 지나갔다. 살랑거리던 바람은 데니에게로 다가가 그가 읽던 책을 간질이며 장난을 걸었다.

순간, 데니가 고개를 들었다. 미양과 눈이 마주쳤다. 미양은 뜨거운 것에 덴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며 시선을 피했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것을 본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