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방스 소설쓰기

따로 또 같이 프로방스를 걷다 13회

비올렛뜨 2015. 5. 27. 19:16

 

 

<13>

 

그의 키스는 아이스크림처럼 부드럽고 디저트로 먹은 초콜릿 케이크보다 더 달콤했다. 입안에서 전해지는 행복이 온몸의 혈관을 통해 흐르며 그녀를 자극했다. 키스에 취해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이대로 모든 것이 멈춰도 좋을 것 같았다.

데니의 뜨거운 입술이 그녀의 목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느낌이 묘했다. 그의 따뜻한 입김을 더 느끼고 싶지만 두려웠다. 그의 손이 거침없이 미양의 브래지어 속으로 들어왔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이었다.

그녀의 이성이 먼저 반응했다. 여기까지는 아직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그의 손을 뿌리쳐야 하는데 굳어진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미양은 몽롱해지는 몸을 부추기며 정신을 차리려 애를 썼다.

어떻게 해야 하나, 이 상황을 어떻게 벗어나야 하나, 하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데니의 사랑을 갈망했지만 이런 방법은 아니었다. 데니의 손이 더 아래로 내려오는 순간 미양은 온 힘을 다해 그를 밀어냈다.

이러지 마. 우린 아직 어리잖아.”

데니의 얼굴이 굳어졌다. 구정물 세례를 받은 표정이었다.

미안해 데니. 근데 이건 아닌 것 같아.”

그의 얼굴이 무너져내리는 빙하처럼 섬뜩하게 일그러졌다.

이제 와서 그게 무슨 말이야?”

말했잖아. 우린 아직 어리고, 아직 이건 아니라고.”

섹스를 원한 건 너였잖아?”

섹스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그래서 날 초대한 게 아니었니?”

, 아니야 그건.”

, 날 비참하게 만들려는 거야?”

그의 눈이 분노로 흔들렸다. 수치심처럼 강렬한 뜨거움이 그의 몸을 휘감았다. 그러나 그 어떤 분노의 감정보다 그녀를 원했다. 그녀를 가지고 싶었다.

데니는 뒷걸음질치는 미양을 향해 다가갔다. 완력으로 그녀를 쓰러트리고 가슴을 더듬었다. 작고 보드라운 가슴이 공포에 젖어 바들바들 떨렸다. 가학적인 본능이 솟구쳤다. 그녀를 차지하고 말겠다는 수컷의 본능에 휩싸였다. 데니는 미양의 옷을 거칠게 벗기기 시작했다. 제발 이러지 말라는 그녀의 애원이 그를 더 흥분시켰다.

이게 바로 네가 원하던 거 아니었어?”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미양이 울면서 오해였다고, 자신이 원한 건 섹스가 아니라 그냥 저녁 한 끼였다고 말해도 믿지 않았다.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의 눈은 분노로 가득했고 미양을 다루는 손길이 거칠었다.

미양은 자신이 뭘 그렇게 잘 못 했는지, 그가 왜 이렇게 화를 내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의 자존심까지 짓밟겠다고 달려드는 데니가 두렵고 무서웠다.

 

미양아!”

미양이 마지막 힘을 다해 데니를 밀어내는 순간 아버지 목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거친 주먹이 데니를 향해 날아왔다. 딸이 성폭행을 당하는 현장을 목격한 아버지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성을 잃기는 데니도 마찬가지였다.

엄마는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미양을 끌어안았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찢어진 옷을 더듬다가 담요를 가져왔다. 그녀보다 엄마가 먼저 정신을 놓을 것 같았다. 엄마는 안간힘을 쓰듯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괜찮아. 이제 괜찮아.”

한숨을 쉬듯 엄마는 괜찮다는 말을 중얼거렸다.

괜찮은 건 아니었다. 데니를 죽일 듯이 달려드는 아버지의 살기 가득한 눈빛, 모든 것을 포기한 듯 아버지의 주먹을 받아들이고 있는 데니의 자포자기하던 눈빛. 모든 것이 괜찮지 않았다.

 

8

2014520

 

시청광장을 나선 미양은 지도를 들고 플라스 투와조모를 찾아 나선다. 엄마가 보낸 엽서에 적힌 주소, 에피노 거리 2번지는 세 그루의 어린 두릅나무라는 이름을 가진 작은 광장 앞에 있다.

리모델링을 한 건물은 세월의 품위를 그대로 살렸다. 오래된 돌에서 집의 역사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미양은 건물현관에서 화숙김이라고 적힌 도어 벨을 발견한다. 후유 다행이다. 안도의 숨을 쉰다.

그녀는 무작정 엄마를 찾아 이곳으로 오면서 불안했다. 엄마와 연락이 안 되는 상태에서 엄마의 존재를 확인할 길이 없었다. 만약, 엄마가 엉뚱한 주소를 엽서에 적은 것이라면 낭패를 당할 것이 뻔했다. 다행히 엄마는 이곳에 살고 있다. 미양은 반가운 마음으로 벨을 누른다.

응답이 없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미양은 8개의 도어 벨을 모두 눌렀다. 묵묵부답이다. 낙담한 미양은 풀이 죽어 광장 카페에 주저앉는다. 메뉴판을 들고 온 갹송이 조심스럽게 미양의 안색을 살핀다. 우선 뭐라도 먹어야 할 것 같다. 미양은 프로방살 샐러드와 함께 분홍빛 와인을 주문한다.

크리스마스 조명이 가득한 미라보 거리 카페 테라스에서 분홍빛 와인을 홀짝이던 엄마 생각이 더 간절해진다.

 

미양은 크리스마스 방학이 끝나고 일주일이 지나서야 등교했다.

일주일간 집안은 시베리아 벌판보다 매섭고 추웠다. 거대한 해일과 쓰나미에 휩쓸린 현장처럼 곳곳이 상처투성이였다. 미양은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뺨을 맞았다. 분을 못 이긴 아버지는 집안 살림을 집어던지며 화풀이를 해댔다. 다혈질에 흥분을 잘하는 성격이었지만 딸 앞에서 노골적으로 화를 낸 것은 처음이었다.

저거 당장 내 눈앞에서 치워버려. 빨리 한국으로 보내버리라고.”

알았어요. 여보. 내일 당장 보낼게요.”

그럴 때마다 엄마는 아버지 비위를 맞췄다.

침전물처럼 가라앉았던 화를 다 걸러낸 후에야 아버지를 설득했다. 아버지는 현실적인 엄마의 타협안에 동의했다. 미양은 프랑스에 남게 되었다. 겉모양은 안정을 되찾은 것 같았지만 이미 부녀 사이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만신창이가 되어버렸다.

늘 그렇듯이 그녀를 야단치고 다독인 사람은 엄마였다. 그녀는 매일 밤, 엄마와 아버지가 싸우는 소리를 들으며 데니를 생각했다.

처음에는 자신의 호의를 오해한 그를 원망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에게 미안해졌다. 그의 말대로라면 그녀가 실수한 것이 분명했다. 미양은 아버지의 주먹을 고스란히 받아내던 그의 서늘한 눈빛을 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