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로 또 같이 프로방스를 걷다 17회
<제17회>
화숙은 황폐해진 자신과 마주하기 겁났다. 속에 가두어놓은 것들이 너무 많아서 감당하기 힘들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폭발할지 모르는 폭탄을 안고 살다가 자폭하기에는 자신이 너무 가엾고 안쓰러웠다.
‘너는 왜 이곳에 와 있는가.’ 또다시 자문해 본다.
자신을 찾고 위로를 받고 싶었는지, 프로방스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의 그녀를 만나고 싶었는지, 그녀를 짓누르던 삶들이 일시에 사라지기를 바랐는지, 모르겠다.
갹송이 가져다준 커피를 마시며 화숙은 바다로 눈을 돌린다. 수영하던 쥬디가 화숙을 발견하고 장난스럽게 손을 흔든다. 화숙에게 5월의 지중해는 발을 담그기에도 섬뜩한데 이곳 사람들은 벌써 해수욕을 즐기고 있다.
바닷바람이 차다. 화숙은 카디건 위로 스카프를 두르며 바다로 시선을 모은다. 불쑥 이곳 카페에 앉아서 커피 한잔 마시자고 했다가 남편에게 핀잔을 들었던 옛날 기억이 떠오른다.
결혼기념여행길이었다. 남편이 모처럼 부부만의 시간을 갖자며 모나코와 니스여행을 제안했다. 딸아이도 마음껏 여행을 즐기라며 그녀의 등을 떠밀었다. 화숙은 남편과 모나코를 돌아다니면서 행복했다. 모나코 왕비로 생을 마감한 그레이스 켈리가 부럽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니스로 넘어오는 길에 들른 에즈마을에서 행복은 절정에 달했다. 마을로 들어가는 언덕길을 오르는 내내 남편은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고마워요.”
“뭐가?”
“프로방스로 나를 데리고 와 준거요.”
남편은 어깨를 으쓱하며 화숙을 바라보았다. 별것도 아닌 일에 감동하는 아내가 귀엽다는 듯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니스로 들어와서도 괜찮았다. 주차하고 메세나 광장을 돌아다닐 때도 남편은 기분이 좋았다. 일이 어긋나기 시작한 것은 예약한 호텔이 더블부킹 됐다는 것을 안 순간부터였다. 그들보다 먼저 도착한 손님이 방을 차지했고 빈방이 없었다. 남편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다시 호텔 방을 구해야 한다는 중압감이 그의 신경을 강박적으로 쪼아댔다.
늘 그랬다. 남편은 자신의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으면 불안 증세를 나타냈다. 반면에 화숙은 천하태평에 낙천적이었다. 영국인의 산책로를 따라 줄지어 늘어선 호텔을 바라보며, 빈방은 꼭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마침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니스해변에는 잔뜩 멋을 부린 조명등이 일제히 불을 밝혔다.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온 기분이었다. 화숙은 겨울 한기를 따뜻하게 녹여주는 불빛에 홀렸다. 파도가 춤을 추었고 검은 자갈들이 낭만으로 가득한 노래를 불렀다.
화숙의 몸이 먼저 반응했다. 향이 진한 커피를 마시며 마음으로 니스를 품고 싶었다.
“우리 저기서 커피 한잔 마시고 가요.”
그때 화숙은 남편을 헤아리지 못했다. 들뜬 마음에 남편이 카페를 싫어하는 것을 깜빡했다. 잠시 호텔 문제도 잊었다. 니스해변에서 커피 한잔 마시고 싶다는 생각만 간절했다.
생각하기에 따라 별것도 아닌 소박한 요구였다. 그냥 커피 한잔인데, 남편은 불같이 화를 냈다. 그렇게 한심하게 커피 타령이나 할 거면 여행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당장 집으로 돌아가자며, 펄펄 뛰었다. 남편의 분노조절장치를 건드린 화숙은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 엑상프로방스 집으로 돌아갔다.
쥬디가 물이 뚝뚝 떨어지는 긴 머리를 수건으로 감싸며 개구쟁이처럼 웃는다.
“수영할 때 추웠지? 바람이 차더라.”
“뭐 조금. 그래도 괜찮아.”
괜찮다고 큰소리를 치지만 뜨거운 카페오레를 마시는 쥬디의 입술이 새파랗다.
화숙은 주위 사람들까지도 유쾌하게 만드는 건강한 그녀를 바라본다.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가 번진다. 그녀의 친구가 되어 준 쥬디가 새삼 고맙다.
화숙이 엑상프로방스에 둥지를 튼 지 5개월이 지났다.
14년 만에 만난 엑상프로방스는 옛 모습 그대로였다. 마음은 더 푸근해 보였다. 도시는 오랜만에 찾아온 그녀를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화숙은 유학원에서 예약해준 원룸, 스튜디오에 짐을 풀었다. 그리고 엑상프로방스 마르세유 법과대학 부설 어학원에 등록했다. 매일 어학원에서 프랑스어를 공부하고 주말이면 기차를 타고 아비뇽이나 아를 같은 도시로 짧은 여행을 다니며 프로방스의 삶을 즐겼다.
시내에 있는 그녀의 스튜디오는 좁고 낡았지만 정겨웠다. 집 앞에는 그녀의 단골카페도 있다. 화숙은 외로워질 때마다 그곳에서 커피를 마시며 이웃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그곳에는 어학원에서 배울 수 없는 프랑스어의 묘미가 가득했다.
프랑스어에 익숙해진 후에 만난 프로방스의 삶은 풍성하고 다채로웠다. 크고 작은 축제가 끊이지 않는 엑상프로방스에서 그녀는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행복한 그녀의 일상에는 늘 쥬디가 있었다. 어학원에서 만난 미국인 쥬디는 첫날부터 화숙에게 호감을 보였다. 그녀는 메디컬스쿨 진학을 미루고 프로방스로 왔다고 했다. 운명처럼 만난 프랑스 남자 앙투완과 사랑에 빠져 모든 것을 버리고 그를 따라온 것이다.
“사랑을 놓칠 수 없었어. 메디컬스쿨은 다음에 갈 수 있지만, 지나간 사랑은 다시 돌아오지 않거든.”
쥬디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대신 프로방스에서 새로운 삶을 준비하며 열심히 살았다. 화숙도 그녀가 싫지 않았다. 쾌활한 수다쟁이 쥬디 때문에 생활에 활기가 넘쳤다. 당당한 그녀는 거침없이 화숙의 삶으로 들어왔다.
“파아쑤우?”
“아니. 화숙.”
“미안. 내 발음이 너무 나쁘지?”
“아니. 내 이름이 어려워서 그래. 그냥 숙이라고 불러.”
화숙과 쥬디는 시간이 날 때마다 몰려다녔다. 쥬디 덕분에 화숙의 성격도 밝아졌다. 쥬디가 여는 파티에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이상하게 화숙은 한국에서라면 불가능했을 관계에 쉽게 적응했다. 딸, 미양이 또래의 쥬디와 서로 이름을 부르며 친구가 된 것이 그랬고, 프랑스사람들과 스스럼없이 가까워진 것도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