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 선옥씨
내 친구 선옥씨
그녀와 나는 동갑나기다. 남편들이 같은 회사에 근무하고, 같은 분당에 살았었고,
아들들이 같은 대학에 다니는 대단한 인연이 얽힌 사이지만 우리는 이곳 엑스에서
처음 만날 때까지 일면식도 없던 사이였다.
그런 우리가 끈끈한 우정(?)을 과시하게 된 것은 모두 프랑스어 덕분이다.
처음에 선옥씨는 나 보다 더 대책 없이 프랑스 땅을 밟았다.
여기서 대책이라 함은 전적으로 프랑스어에 관한 것이다.
그녀 역시 나처럼 남편을 따라서 하던 일을 접고 프랑스에서의 낭만적인 생활을
꿈꾸며 이곳으로 날아왔는데.. 그때 그녀의 짐 속에는 프랑스어 사전조차 없었다.
어학원을 다니게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부랴부랴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오는
조카한테 사전을 사다달라고 부탁을 할 정도였다.
우리는 is Aix-en-provence 왕초보 반에서 함께 공부를 시작했다.
우리 반은 기초반이긴 했지만 그 안에서도 실력은 차이가 좀 있었다.
프랑스에 산지 10개월이나 됐다는 러시아 언니부터 한 달 전에 프랑스에 온
선옥씨까지, ‘도토리 키 재기’ 지만 그 당시 우리 입장에서 보면 우리들의 실력은
하늘과 땅 차이처럼 크게 느껴졌다.
공부를 하면서 가장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사람은 선옥씨였다.
그야말로 알파벳도 모르고 시작했는데 쑥쑥 나가는 진도를 따라가려니 죽을 맛이었단다.
프랑스어로 떠드는 선생님이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멍하니 앉았는데...
잘 알아들었니? 모두들 이해했니? 하고 물어보는 선생님질문에 경쾌하게 오케이를
외치는 인간이 죽이고 싶을 정도로 얄미웠다고 한다. 그 얄미운 인간이 바로 나다.
그녀는 수업이 끝날 때마다 인상을 찡그리며 투덜투덜 하소연을 했다.
이렇게 멍하니 앉아 있을 바에야 차라리 수업을 포기하는 게 낫겠다며 속상해했다.
그녀보다 겨우 반걸음 앞서갔던 나는 정말로 그녀가 공부를 포기할까봐 속으로 덜컥 겁이 났다.
아마, 그때는 몰랐지만 그만큼 내가 그녀를 좋아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녀의 실력이 일취월장하고 있었다.
나는 설렁설렁 넘어가서 잘 몰랐던 단어가 몇 페이지 몇째 줄에 있다는 것까지
기억해내는 그녀. 겉으로는 앓는 소리를 하면서도 집에서는 죽기 살기로 공부를
했던 것 같다. 화장실에 갈 때도 프랑스어사전을 들고 갈 정도였단다.
<내 단짝 친구 선옥여사. ㅋㅋㅋ>
이런저런 사정으로 우리는 3개월 만에 is어학원을 그만두게 됐다.
솔직히 공부가 살짝 지겨웠던 우리는 다른 방법으로 프랑스어공부를 할 핑계를
찾으면서 당분간 휴식기에 접어들었다.
어학원을 다니느라 가지 못 했던 여행을 다니며 한 달쯤 쉬었을까?
우리는 다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임시방편으로 일주일에 한 번 프랑스인교사에게
과외를 받고, 교육방송을 보고 함께 공부를 하는 스터디그룹을 만들면서 우리는
다시 프랑스어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참 이상했다.
분명 공부는 열심히 하느라고 하는데 왜 실력은 별로 늘지 않는 건지, 분명히
공부할 때는 알겠는데 프랑스인들을 만나면 왜 말문이 꼭꼭 막히는지...
우리는 공부를 하면서도 내내 이런저런 프랑스어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래! 이렇게 지지부진할게 아니라 본격적으로 해 보자!
나는 과감하게 엑스법과대학부설 어학과정이라는 카드를 꺼내들었다.
<주 20시간 이상, 젊은 친구들 틈에서 수업을 해야 한다는 과정이 두렵지만
그래도 그 방법이 제일 나을 것 같았다.>
처음에 내가 대학부설 어학코스에 등록하자는 이야기를 꺼내자
그녀의 반응은 단호했다. 난 못해! 살림하면서 그렇게 힘든 공부는 못해! 였다.
하긴, 우리 본업은 살림하는 주부다. 유학을 온 것도 아니면서 공부 때문에 살림에
소홀하면 직무유기가 되는 거다. 그런데, 웬수같은 프랑스어 스트레스는 어떡하지?
<엑스법과대학부설 어학원. 나는 매일 이 앞을 지나다니며 갈등의 세월을 보냈었다>
다행히 남편은 내가 공부를 하겠다면 밀어주겠다는 입장이었다.
학비는 물론이고, 공부에 쫓겨서 살림에 소홀하게 되더라도 너그럽게 봐주겠단다.
이렇게 멋진(?)남편의 외조에 힘을 입어 등록을 할까 말까 망설이는데 선옥씨에게 전화가 왔다.
갑자기 마음을 바꿨다며 나랑 같이 학교를 다니기로 했단다. 오잉?
이유는 단순했다. 어학연수를 온 한국여학생이 그 학교에서 공부를 하면 프랑스어실력이
쑥쑥 늘 거라고 마구마구 부추긴 것이다. 공부도 어렵지 않다고 했던 말이 결정적이었던 것 같다.
칫! 내가 등록하자고 할 때는 끄덕도 않더니...
뒤늦게 마음을 굳힌 선옥씨는 늦바람이 무서운 사람처럼 등록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몰아붙이는 선옥씨 덕분에 우리는 학교에 등록을 하고 나란히 늦깍이학생이라는 타이틀을 달았다.
앞으로 1년, 우리는 서로에게 징징거리며 프랑스어스트레스를 하소연할 것이고 서로에게 경쟁의식을
느끼며 눈에 불을 켜고 프랑스어공부를 할 것이다.
글쎄, 우리 우정의 밑거름이 된 프랑스어에게 감사를 해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