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늬만 유학생3
올가와 함께 점심을 먹으며...
선옥씨가 올가와 점심약속을 해 놓았다. 러시아인인 올가는 예쁜 얼굴에
날씬한 몸매를 자랑하는 마흔 한 살 아줌마다. 러시아에서는 소아과의사였다는데
남편을 사랑한 죄(?)로 직업을 버린 지 너무 오래됐단다.
그녀는 남편을 따라서 독일에서 7년을 살았고, 지금 프랑스에서 살고 있는 것도 벌써 2년째다.
대부분의 직업이 그렇지만 의사라는 전문직업도 국경을 넘어가면
그래서 말이 전혀 안 통하면 별 볼일이 없어지는 법.
그녀는 팔자에도 없는 전업주부 생활을 9년째 하고 있는 셈이다.
<올가를 처음 만났던 Gordes 마을--프랑스에서도 손꼽히는 아름다운 마을이다>
올가를 처음 만난 건, 남편 회사 모임에서였다.
루베홍 산자락에 있는 예쁜 마을 고흐드와 후시옹을 돌아보고 멋진 프랑스식당에서 점심을 즐길 때
그녀가 내 맞은편에 앉았었다. 대개 남편 회사모임에서는 영어로 대화를 하는데, 그녀는 내게 프랑스어로
말을 건네 왔다. 독일어는 잘 하지만 영어는 잘 못하는 그녀와 영어는 쬐금 하지만 독일어는 전혀 못하는
나는 할 수 없이 짧은 프랑스어로 수다를 떨었다.
그날, 나는 올가가 다른 러시아여자들처럼 뚱뚱하지 않은 것이 신기해서
(지금까지 내가 만난 러시아언니들은 다 뚱뚱했으니까) 왜 러시아여자들은 결혼하면 살이 찌냐,
당신은 어떻게 관리를 하느냐 등등 내 수준으로는 어려운 프랑스어를 구사하면서 대화를
하느라 진땀을 흘렸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6개월 후, 학교예비모임을 하던 날 그녀를 다시 만났다.
그녀는 학교를 다니기 위해 마노스크에서부터 엑스까지 매일 등하교를 해야한단다.
엑스에서 마노스크까지 한 시간이 넘게 걸리는 거리니 참 대단하다.
단지, 집이 가깝다는 이유로 학교를 선택했던 내게 그녀의 열성은 신선한 충격과 같았다.
선옥씨는 올가를 처음 본 순간부터 굉장히 마음에 들어 했다.
올가가 예쁜 얼굴만큼 마음이 착해 보인 탓도 있지만 그녀가 영어를 못해서 프랑스어만 한다는 것이
제일 마음에 든다나? 게다가 우리보다 프랑스어를 더 잘하니 금상첨화!
앞으로 그녀와 만나서 수다를 떨면 프랑스어가 많이 늘겠다며 은근히 좋아하더니
급기야 우연히 학교마당에서 만난 올가와 점심약속까지 잡아놓았다.
학교 근처의 카페에서 점심을 먹으며 우리들의 수다가 시작됐다.
남편들이 같은 직장에 근무하는 공통점 때문인가 우리는 쉽게 말문을 열었다.
주말에 뭐했느냐, 다음주 쁘띠방학때 뭘 할거냐, 한국에서 직업이 뭐였냐,
아이들은 몇이냐, 나이는 어떻게 되느냐, 왜 프랑스어를 공부하려고 하냐...
이런저런 실용대화를 나누다가 갑자기 한국식 나이와 프랑스식 나이가 다른 점에
관한 이야기가 시작됐다. 우리는 한국식 나이가 프랑스식 나이랑 다른 점을 설명했다.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한 살이 되고, 12월생인 아이는 태어난지 한 달 만에 두 살이
된다는 점을 설명하는데, 짧은 프랑스어로는 무리였다. 공책을 꺼내서 숫자와
프랑스어를 써가면서 필담 아닌 필담을 나눈 끝에 복잡하고 어려운 한국식 나이를 설명했다.
올가는 한국식나이가 갖고 있는 존중의 의미를 이해하지만, 나이가 더 많아지는 건 마음에 안든단다.
동서를 막론하고 늙는 건 싫은 모양이다. 특히 여자들은 더 그럴테지...
또, 우리는 러시아와 한국에서 의사가 되려면 몇 년을 공부해야 하는지,
의사가 되면 돈을 얼마나 버는지 등등 러시아와 한국사회의 차이점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가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어려운 경제상황 이야기까지 하게됐다.
러시아와 한국의 집값문제, 주식시장 폭락해서 손해를 본 이야기...
남들이 들으면 굉장할 것 같지만 실은 아주 짧은 프랑스어로 우리는 복잡하고
어려운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렵게 필담까지 동원해가며 나눈 대화가 즐거웠는지...
올가는 방학 끝나고 나서 다시 만나잖다.
올가는 하루 빨리 프랑스어를 배워서 다시 이곳에서 의사로 일하고 싶은 꿈을 갖고 있다.
이곳 프랑스병원에는 외국인 의사를 위한 수련과정이 있다는데,
우선 말을 배운 다음에 수련과정을 거치면 프랑스에서 의사로 일을 할 수 있단다.
9년이 넘게 계속된 전업주부 생활을 청산하고자 프랑스어공부에 매진하고 있는 그녀.
단지 삶의 질을 윤택하게 하기 위해서 프랑스어공부를 하려는 우리보다 목표의식이
뚜렷해서 그런 가... 그녀의 회색빛 눈동자가 더 아름답게 빛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