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방스식 추석!
프랑스에서 빚은 송편
결혼하고 처음으로 명절을 외국에서 보낸다. 이른바 명절을 땡땡이치는 것이다. 신난다.
평소에도 명절스트레스는 거의 느끼지 않았지만 주부로써 명절을 잊고 지낸다는 건 일탈의 행복 같다.
그래서 효정엄마가 추석인데, 함께 모여서 음식을 만들고 식사라도 할까요... 하는 제안에 흐지부지
대답을 피했다. 차례상은 한국에서 어머님들이 잘 차리셨을 텐데 우리는 뺀질이처럼 쉬어가지 뭐...
하는 마음이 앞선 까닭도 있다.
마음 착한 효정엄마는 아무래도 추석을 그냥 보내기가 아쉬웠나보다.
한국 엄마들끼리 모여서 송편을 만들어먹을 건데 함께 가겠냐고 물어본다.
송편? 아니 한국에서도 사먹던 송편을 만든다고? 신기한 마음이 들어서 따라 나섰다.
모두들 처음 온 나를 반갑게 반긴다. 인상만큼 좋은 분들 같다.
나처럼 남편을 따라서 프랑스로 온 주부들부터 박사과정을 마친 연극비평가까지
여자와 엄마 그리고 주부라는 공통점으로 똘똘 뭉쳐서 낯선 곳에서의 추석준비를 시작했다.
전을 부치고, 나물을 무치고 토란탕을 끓여먹는 제대로 된 추석상은 아니지만 추석에만 먹을 수 있는
송편을 손수 빚어서 먹는다는 사실 하나로 추석 기분을 제대로 낼 것 같았다.
집주인이 미리 준비한 쌀가루(동양마켓에서 판단다) 반죽을 동글동글하게 빚어서 콩과 깨를 넣고 송편을
빚기 시작했다. 손이 여럿이라 그런가 금방금방 송편이 빚어진다.
모두들 송편을 빚은 것이 얼마만인가 감개무량한 표정이다. 서울에서도 추석 송편 빚기는 사라진지
오래된 풍습이다. 이미 한국의 주부들도 송편 한 접시를 상에 놓기 위해서 하루 종일 걸리는 송편 빚기에
매달리지 않는다. 이른바 아웃소싱, 송편도 전문가가 만들어 놓은 것을 사다가 상을 차리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 송편을 빚은 것이 언제였던가... 기억마저 가물가물할 정도인데
멀리 프랑스까지 와서 송편을 빚다니 감개가 무량하다. 그런데 이게 웬일? 자신 있게 시작한 송편 빚기가
초장부터 엇나가기 시작한다. 떡 반죽에 문제가 있는지 아니면 속을 너무 많이 넣었는지 깨가 반죽 밖으로
삐질삐질 빠져나와 엉망진창이 돼 버린다. 나, 20년 경력의 주부 맞아?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다.
모두들 솜씨는 제 각각. 내가 빚은 서울식 작은 송편부터 경상도식 송편 그리고 만두크기 만한 송편까지...
서로의 솜씨를 낄낄거리며 만들다보니 어느새 뚝딱 다 됐다.
집주인이 준비한 식혜(아니 엿기름가루는 어디서 나서 만들었담?)와 함께 맛 본 송편은 환상이다.
서울에서 공수해 왔다는 참기름까지 자르르 발라서 윤이 나는 송편을 먹다보니 생각지도 않은 추석을
지낸 기분이다. 횡재를 한 기분이 이럴까. 역시 대한민국 주부들은 강하다.
어디다 내 놓아도 우리 전통을 잊지 않고 살아남을 만큼 강하고 아름답다.
새삼 명절을 땡땡이 친 기분에 들떠있던 내 자신이 부끄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