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서 놀던 날
프랑스어회화 모임시간까지 두 시간이 남았다. 뭘 할까...막바지 세일에 접어든 부띠끄 순례를
하며 쇼핑을 할까... 아니면 카페에 앉아 햇살놀이를 할까...가벼운 망설임 끝에 내 발길이
도서관으로 향한다. 순간 나의 오래된 습관이 되살아난다. 방랑을 끝내고 고향집을 찾은
사람처럼 마음이 편안해 진다.
(도서관 담장 가득한 개나리들. 우리나라 개나리와 비슷해보여서 그냥 개나리라고 부른다.
성격급한 프로방스 개나리들은 1월부터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한때 도서관은 나의 놀이터였다. 엄마가 저녁 먹으라고 불러도 계속 놀기만 하는 아이처럼,
밥할 시간이 다 됐는데도 집에 가기 싫을 정도로 놀 것이 많은 곳이었다. 특히 내가 살던 분당도서관은
최고의 시설을 자랑하는 놀이터였다. 눈만 돌리면 읽고 싶은 책들이 지천이었고, 밥값이며 커피 값은
또 왜 이렇게 싼지...시간만 있다면 매일매일 이곳으로 놀러오고 싶었다. 딱 한 가지 단점이라면
뒹굴뒹굴 편안한 자세로 책을 읽는 수가 없다는 것인데 그때는 책을 빌리면 된다.
대출은 공짜였고 대출기간을 넘겨도 벌금이 없었다.
(도서관으로 들어가는 입구. 까뮈의 이방인이 우리를 맞이한다.)
이렇게 책을 빌려 읽는 방법은 더 많은 책을 만날 수 있는 나만의 방법이기도 하다.
프리랜서였던 나는 일이 많을 때는 기절할 정도로 바빠서 책을 읽기는커녕 가까이 가지도 못 했다.
일하랴 살림하랴 늘 동동거리며 살았던 탓에 한가롭게 앉아서 책을 읽을 여유가 많지 않았다.
가끔 시간이 날 때마다 마음만 앞서서 책방을 돌아다니며 읽고 싶었던 책을 사기도 했는데 거기까지였다.
책을 소유했다는 안도감에 방심해서 정작 책읽기는 게을리 했다. 이번 일만 끝나면 꼭 읽어야지 하면서
차일피일 미루기 일쑤였다. 반대로 빌려온 책은 의무감으로 읽었다. 벌금은 없다지만 빌려온 책을
무한정 집에 놓아둘 수는 없었다. 덕분에 책과 가까워진 나는 책읽기 습관을 바꿔버렸다.
우선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다가 읽고, 마음에 드는 책이 있으면 책방에 가서 그 책을 샀다.
(까뮈를 추억하는 상설 전시장. 프로방스 마을 루마항에서 살던 그는 근처 도로에서 교통사고로 죽었고,
루마항에 묻혔다. 2010년은 까뮈 사후 50주년이 되던 해. 이곳에서 전시회가 열렸다.)
이런 나의 책읽기 습관은 프랑스 생활과 함께 흐지부지 사라졌다. 아니 산산조각이 났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겠다. 달랑 옷가방만 들고 와서 시작한 정신없는 프랑스 생활 속에서 책은 사치였다.
무게 때문에 기내가방에 넣어 온 책 다섯 권이 전부였으니까. 그 후, 고국에서 제공되는 생필품과
함께 책이 조금씩 늘기는 했지만 나는 쉽게 책을 꺼내들지 못했다.
예전처럼 바쁘게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책을 읽을 시간이 없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책을 읽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처음 한두 달은 프랑스생활에 적응하랴, 바뀐 생활환경에 적응하랴 바빠서
그랬고 프랑스어를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의식적으로 한국책을 멀리했다. 내가 가진 모든 에너지를
프랑스어공부에 쏟아도 부족한 상황에서 한가롭게 책을 읽을 마음에 여유가 없었다.
그 시절, 내게 책은 그림의 떡이었다. 한국어책은 사랑하지만 헤어져야 하는 연인이었고, 프랑스어책은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었다. 오로지 프랑스어문법책과 사전만 끌어안고 미련하게 살았으니까.
(도서관 마당. 햇살이 좋은 날에는 해바라기를 하며 책을 읽기에 좋은 곳이다.)
엑스의 도서관은 시설도 다양하다. 책은 물론이고 음악과 영화자료를 모아놓은 자료실도 따로 있다.
매달 도서관이 기획한 전시회와 행사들도 다양하게 열리고 있다. 일년에 한 번씩 한국작가들과의
만남행사도 열린다. 작년에는 황석영, 이승우, 신경숙, 김영하작가들과의 만남이 연출되기도 했다.
열람실로 들어선다. 세련된 분위기가 편안하게 다가온다. 한국도서관에서처럼
기가 죽거나 주눅 들지도 않는다. 어차피 내가 다 읽을 수 있는 책들이 아니니까.
내가 주로 읽는 책들은 글보다 그림이 많은 것들이다. 그림책을 뒤적거리다가 심심해지면
예술가들을 만나러 간다. 엑스의 화가 세잔과 엑스에 살았던 화가 피카소의 삶과 작품스타일을
비교분석한 책을 건성건성 보다가 묵직한 사진집을 펼쳐든다. 프랑스 실존주의시대 휴머니스트
작가인 에두아흐 부바(Edouard Boubat)와 호베흐 두와노(Robert Doisneau)의 책들이다.
한때 그들의 사진에 마음을 빼앗겼던 나, 다시 그들의 사진을 만난 기쁨에 살짝 흥분된다.
부바의 사진집에 쓰인 그의 글에 가슴도 뭉클해진다. 어린 시절, 자신을 ‘내 토끼야’라고 부르며
목마를 태워주시던 아버지를 추억하는 작가. 그는 어느새 아들이, 아버지와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어린 손주에게 목마를 태워주는 모습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그의 사진에는 많은 이야기가 담겨있다.
그가 사진과 함께 남긴 짧은 글들은 철학적이기도 하다.
나는 그의 사진과 함께 그가 살았던 시절을 여행한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시작된 여행은
태어나서 나이들 때까지 계속된다. 그의 사진 속에는 쟝 쥬네와 프랑스와즈 사강도 있었고,
87년 민주화운동이 한창이던 시절 한국의 한가한 어촌풍경도 담겨있다.
사진은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의 기록이다.
두아노의 감성적인 사진들은 언제 봐도 가슴이 설렌다. 유명한 ‘시청 앞의 키스’를 한참 바라보다가
책장을 넘기는 순간 짓궂은 작가를 만난다. 그는 누드사진을 걸어놓은 상점 진열장 뒤에 숨어서
사진을 찍었다. 몰래카메라의 시조랄까...말이 필요없는 사람들의 각양각색 반응이 정말 재미있다.
문득 시계를 보니 약속시간 5분전이다. 후다닥 짐을 챙기며 일어서는데 미련이 엉킨 국수 가락처럼
심란하게 밀려온다. 아직 윌리 호니(Willy Ronis)와 앙리 까흐디에 브하쏭(Henti Cartier Bresson)의
사진집도 못 봤는데... 만나서 안부라도 묻고 싶은 작가와 예술가들이 얼마나 많은데...
두 시간은 도서관에서 놀기에 너무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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