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회>
엄마가 엑상프로방스에 있다니 믿을 수 없었다.
엄마는 왜 그렇게 먼 곳으로 떠난 것일까. 더구나 그곳은 그녀가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할 수만 있다면 영원히 그녀의 인생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곳이다. 대체, 왜 엄마는 엑상프로방스로 간 것일까. 미양은 엄마의 엽서를 읽고 또 읽었다. 엄마의 마음마저 읽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엽서 속의 엄마는 다른 사람 같았다. 지금까지 그녀가 알고 있던, 답답할 정도로 순종적이고 매사에 우유부단하고 소극적인 엄마가 아니었다. 식구들의 기에 눌리고 주눅이 들어서,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집안일이나 하던 그런 엄마가 아니었다. 뭐라고 표현할 수 없지만, 엽서 속의 엄마는 잔 다르크처럼 당당한 목소리로 자아 선언을 하고 있었다.
솔직히 미양은 그런 엄마가 싫지 않았다.
엽서 속의 엄마라면 오랫동안 터놓지 못했던 그녀의 속마음을 보여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반면에 미양은 아버지한테 엄마의 엽서를 보여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누구의 내가 아닌 나로 존재할 수 있다는 기쁨에 온몸이 떨린다.’는 엄마를 아버지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우선 아버지한테 엄마에게 엽서가 왔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미양은 길게 한숨을 쉬며 엄마의 엽서를 책상 서랍 깊숙한 곳으로 밀어 넣었다.
4
2014년 5월 20일
인포메이션센터 직원이 상냥하게 웃으며 주말에 있을 축제를 알려준다.
엑상프로방스는 거의 일 년 내내 크고 작은 축제가 열리는 도시라며, 주말에 열리는 축제에 꼭 참석하라는 당부를 한다. 그러면서 미양에게 두 가지 지도를 내민다.
하나는 엑상프로방스 가이드 지도고 다른 하나는 엑상프로방스가 낳은 세계적인 화가 세잔의 지도다. 세잔이 태어난 집과 그가 즐겨 다니던 카페 그리고 그가 그림을 그리던 아틀리에가 표시되어 있다. 이런 지도도 있었다니. 엑상프로방스는 마치 세잔을 위해 존재하는 도시 같다.
신기한 듯 지도를 들여다보던 미양이 엄마가 보낸 엽서를 꺼내 든다. 엄마가 사는 곳을 지도에 표시해 달라고 하자, 직원은 친절하게 차근차근 형광펜으로 길 표시를 해 준다. 법원 건물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미양은 곧 엄마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새벽하늘을 가르며 열기구를 타는 것처럼 기분이 좋아진다.
인포메이션센터를 나선 미양은 거대한 분수가 햇빛에 반짝이는 호똥드 광장으로 들어선다.
차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어지는 호똥드 로터리 한구석에 세잔의 동상이 서 있다. 사진 속에서 만났던 세잔보다 키가 크고 야윈 모습이다. 화구를 메고 지팡이를 짚은 그의 발길은 생트 빅투아르 산을 향하고 있다.
미양은 자신에게 묻는다. 그녀가 살았던 시절에도 세잔의 동상이 이곳에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다. 세잔은 물론이고 그녀가 이곳에 살았던 기억조차 흐릿하다. 오직 한 사람. 상처로 남았던 그의 존재만이 또렷하게 떠오른다.
14년 전, 그녀의 삶을 뿌리째 흔들어 놓았던… 대리석 조각처럼 투명하고 아름다웠던 미소년 데니의 얼굴이.
아버지가 남프랑스에 있는 연구소로 발령을 받았을 때, 미양은 전교 1등 성적표를 받아들었을 때보다 더 기뻤다.
사춘기에 접어든 소녀에게 프랑스는, 프랑스에서의 삶은 화려한 과일을 잔뜩 얹은 생크림 케이크보다 달콤한 것이었다. 전생에 나라를 구한 것이 틀림없다는 친구들의 부러운 야유를 받으며 그녀는 엄마와 함께 이삿짐을 꾸렸다.
엄마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좋았다. 엄마는 프랑스 그것도 프로방스에서 시작될 새로운 인생에 대한 기대로 잔뜩 들떠있었다. 엄마에게 프로방스는 시어머니가 만들어 놓은 암울한 그늘을 벗어나 따뜻한 햇볕이 쏟아지는 축복의 땅으로 들어서는 일이었다.
인천공항을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기 전까지 모든 것이 좋았다. 12시간의 긴 비행을 끝내고 지친 몸으로 파리 드골 공항에 내렸을 때도 나쁘지 않았다.
프로방스로 가는 비행기를 갈아타려고 파리 드골공항의 B 존을 찾아가는 길에 갑자기 속이 메슥거리며 두통이 시작됐다. 프랑스어와 프랑스 억양이 잔뜩 들어간 영어를 듣는 순간 속이 다 뒤집힐 것 같은 멀미가 일며 앞이 캄캄해졌다.
비로소 우리말을 한마디도 할 수 없는 곳에서 공부해야 한다는 현실이 공포로 다가왔다. 핑크빛 꿈에 들떠서 간과했던 문제였다. 남의 나라말로 공부하고, 좋은 성적을 내야 한다는 부담감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왔다. 무서웠다.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영어 학원에 다녔고 방학 때마다 미국으로 필리핀으로 어학연수를 다녀왔어도 이건 다른 문제였다.
프로방스에 도착했을 때, 미양은 그곳에서 펼쳐질 새로운 삶에 대한 설렘과 기대보다 두려움으로 가득 차서 어두운 고속도로를 바라보았다. 암담한 그녀의 미래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등교 첫날은 마침 새로운 학년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엑상프로방스 근교 작은 마을에 있는 인터내셔널 스쿨은 프랑스 아이들과 외국 아이들이 섞여서 공부하는 중학교였다. 학교 분위기는 어수선했고 미양의 불안감은 고조됐다.
아버지는 미양을 학교에 내려놓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긴장하지 마라. 넌 잘할 수 있으니까.”
아버지 목소리는 신념처럼 강직했다.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는 손길은 공부 잘하는 딸에 대한 믿음으로 가득했다. 그래서일까. 아버지는 그녀를 휘감던 두려움의 실체를 눈치채지 못했다.
교실로 들어선 미양은 눈치를 살피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삼삼오오 모여서 떠드는 아이 중에 동양인은 한 명도 없었다. 여기저기서 웅성웅성 영어와 프랑스어가 들렸다. 주눅이 든 미양은 구석 자리를 찾아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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