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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방스 소설쓰기

따로 또 같이 프로방스를 걷다 8회

 

<8>

그날 이후 미양은 데니의 시선 속에 무언가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착각이 아니었다. 분명 그는 미양에게 관심이 있었다. 가슴 떨리는 일이었다. 한편으로 친구를 배신하는 것 같은 미안한 일이었다. 그를 향한 로잘린의 마음을 그 누구보다 잘 알기에 데니와 절대로 가까워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들었다. 한 남자를 두고 친한 친구와 치정으로 얽힐 수는 없지 않은가.

 

로잘린은 생각보다 둔했다. 아니 방심한 것인지도 몰랐다. 늘 미양과 붙어 다니면서 데니가 미양을 바라보는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다. 오히려 소피아가 데니의 변화를 눈치채고, 미양을 경계했다.

우정을 위해서 그를 향한 마음을 포기해야 하는데 잘되지 않았다. 흐르는 강물을 거스를 수 없는 것처럼 그를 향해 흘러가는 마음을 막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남자친구를 사귄 적 없었고, 또래 친구들처럼 연예인에게 열광해 본 적 없던 미양에게 이런 감정은 너무 버거웠다. 견디기 힘들었다.

미양은 자신에게 찾아온 이 변화의 정체를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로잘린처럼 혼자서 꿈꾸는 사랑일지 몰라도 그녀에게는 소중했다. 너무 소중해서 그 누구에게도 보여 줄 수 없었다.

 

5

2014520

미양은 인포메이션센터에서 받은 지도를 들고 구시가지 골목길로 들어선다. 카페와 레스토랑 그리고 크고 작은 부티크들이 늘어선 골목길은 미라보 거리와 다른 풍경이다. 예전에 이 길을 걸었던 것 같다. 골목길은 어딘지 익숙하면서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녀는 아리아드네가 준 실타래를 들고 미궁으로 들어가는 테세우스처럼 지도를 꽉 움켜잡는다. 지도만 있으면 길을 잃을 걱정은 없다. 미양은 크게 심호흡을 하고 엑상프로방스 골목길 산책을 나선다. 골목골목 이어지는 길이 정겹다. 3백 년이 넘은 건물들이 고풍스레 서 있다. 미양은 천천히 걸으며 주위를 둘러본다. 골목길이 품고 있는 아름다움이 오감으로 느껴진다.

미양은 골목길을 지나 시청 앞 광장으로 접어든다. 햇살이 쏟아지는 광장에서 현악 4중주 연주가 한창이다. 사람들은 카페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다. 미양의 발길이 저절로 카페로 향한다. 엄마를 찾는 일은 잠시 잊고, 카페에 앉아 연주를 듣고 싶어진다.

햇살이 그녀의 머리를, 어깨를 지나 등 뒤로 부드럽게 쏟아진다. 미양은 커피를 마시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시청 시계탑 근처에서 사진을 찍는 여행자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길을 걷는 사람들의 시선이 카페로 향하는 순간 카페에 앉은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눈길이 마주친다. 마주치는 눈빛 속에는 따뜻한 애정이 담겨있다.

그 시절, 미양과 데니가 애정 어린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던 것처럼.

 

네가 많이 보고 싶을 거야.”

로잘린이 미양을 와락 껴안으며 말했다.

겨우 3주일인데 뭐.”

말은 이렇게 했지만, 미양도 서운했다. 곧 크리스마스 방학인데 로잘린 없이 방학을 보낼 일이 막막했다. 그 사이 데니를 향한 로잘린의 사랑은 덤덤해졌다. 짝사랑의 아련한 감정을 못 이겨 훌쩍거리며 미양에게 하소연하는 일도 줄어들었다. 더불어 미양의 마음도 가벼워졌다. 로잘린은 크리스마스 방학 동안 데니를 못 보는 것보다 미양과 헤어질 일을 더 아쉬워했다. 우정이 짝사랑을 이긴 것 같다며 수줍게 웃기도 했다.

크리스마스방학을 앞두고 로잘린은 필라델피아에 있는 할머니네로 휴가를 떠났다. 매년 크리스마스를 온 가족이 함께 보내는 것이 로잘린네 가족의 전통이었다.

방학 일주일 전, 학교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미국이나 캐나다에서 온 아이들은 로잘린처럼 방학을 앞당겨 고국으로 크리스마스를 보내러 갔고, 프랑스 아이들은 여행을 핑계로 결석했다.

아이들이 떠난 교실은 휑했다. 그나마 데니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데니는 미양에게 따뜻한 눈빛을 보내거나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철 지난 바닷가처럼 썰렁해진 스쿨버스에서도 그랬다. 미양은 등굣길 스쿨버스를 타면서 혹시나 하는 기대에 부풀었다. 늘 미양의 옆자리에 앉던 로잘린이 결석했으니 혹시 그가 옆에 앉을 지도 모를 것 같았다. 데니는 미양의 존재를 잊은 사람처럼 그녀를 스쳐지나 뒷자리로 갔다. 미양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날따라 수업이 일찍 끝났다. 아이들이 없어서 정상적인 수업이 힘들었다. 스쿨버스가 오려면 두 시간이나 기다려야 했다. 새삼 로잘린의 부재가 아쉬웠다.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도 모두 떠난 터라 외로웠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리도 복잡했다.

해결책은 단 하나. 어려운 수학문제를 푸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미양은 수학을 잘했다. 복잡한 수학문제를 풀다 보면 스트레스도 함께 풀렸고, 외롭고 쓸쓸하던 마음도 사라졌다. 미양은 수학책을 꺼내 들고 빈 강의실로 스며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수학문제를 푸느라 집중하던 미양은 시계를 보고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벌써 스쿨버스가 떠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