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프로방스 소설쓰기

따로 또 같이 프로방스를 걷다 9회

 

<9>

미양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어떻게 집으로 돌아갈지 몰랐다. 매일 스쿨버스만 타고 다녀서 학교에서 집까지 얼마나 먼지, 집으로 가려면 어떤 버스를 어디서 어떻게 타야 하는지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갑자기 초등학교 1학년 때, 수영장 셔틀버스를 놓치고 울면서 집까지 뛰어가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는 집이 어딘지, 수영장과 집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는 알고 있었다.

당황한 미양은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엄마는 차가 없다. 도움이 못 될 거라는 생각에 짜증이 났다. 그래도 기댈 사람은 엄마밖에 없었다.

 

학교 앞 버스정류장이 어디 있는지 알지?”

버스정류장? , 어딨더라

, 교문 들어가는 입구에 말이야.”

! 거기

미양의 목소리가 두려움으로 살짝 떨렸다.

거기서 버스를 타고 가르당느 기차역에서 내리렴.”

또 기차를 타라고? 집으로 바로 가는 버스는 없어?”

이번에는 미양의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났다.

엄마도 잘 모르겠어. 아마 없을 거야. 하여튼 가르당느역에서 엑상프로방스로 가는 기차를 타. 엄마가 기차 시간 찾아보고, 기차역으로 마중 나갈게.”

 

엄마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차근차근한 엄마의 설명을 듣는 동안 미양의 마음도 차분해졌다. 만약 수영장 셔틀버스를 놓쳤을 때 지금처럼 엄마에게 전화했더라면 공포에 젖어 울면서 집까지 달려가지 않았을 텐데, 하는 후회가 들었다.

 

버스에 오른 미양은 출입문과 가까운 곳에 자리 잡고 앉았다. 엄마가 알려준 가르당느역까지 얼마나 먼지, 어디서 내려야 하는지 알 수 없어서 불안했다.

그때 익숙한 시선이 느껴졌다. 습관처럼 고개를 돌리던 미양은 데니와 눈이 마주쳤다. 데니와 같은 버스를 탔어. 미양은 안도의 숨을 쉬었다. 가슴도 쿵닥거렸다. 사막을 헤매다 오아시스를 만난 것처럼 기뻤다.

이런 마음과 달리 그에게 말을 걸 용기가 나지 않았다. 가르당느역이 어딘지, 어디서 버스를 내려야 하는지 알려달라는 말이 입안에서만 맴돌았다. 처음 타보는 프로방스 버스는 안내방송도 없었다. 하긴 방송이 나왔어도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미양은 버스가 멈출 때마다 고개를 빼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다섯 번째 정류장이야.”

 

데니가 미양 곁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미양이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다섯 번째 정류장이면 어디지? 지금까지 지나온 버스정류장을 세느라 미양이 허둥거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버스가 멈춰 섰다.

지금이야.”

데니가 와락 미양의 손을 잡고 버스에서 내렸다. 조건반사처럼 미양의 손바닥에 땀이 고였다.

기차가 들어오고 있어. 뛰자!”

 

그는 미양의 손을 잡고 정신없이 기차역을 향해 뛰었다. 정신이 혼미해지고 숨이 가빠왔다. 그들이 가르당느역으로 뛰어들자 엑상프로방스로 가는 기차가 들어서고 있었다. 미양은 표를 살 겨를도 없이 데니에게 이끌려 기차를 탔다.

출발하는 기차에 겨우 올라탄 두 사람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짧은 순간 그의 얼굴에 미소가 스쳤다. 끓는 물과 얼음이 뒤섞이는 미소였다. 미양의 가슴이 떨려왔다.

잠시 적막이 흘렀고 그제야 미양은 그와 잡고 있는 손이 어색해졌다. 그녀가 살짝 손을 빼려고 하자 데니는 잡은 손에 더 힘을 주었다. 미양은 탄식처럼 흘러나오는 한숨을 삼켰다. 가벼운 현기증이 일었다. 잡은 손의 의미를 알고 싶었다. 고집스레 그녀의 손을 놓지 않으려는 데니의 마음이 궁금했다. 그동안 그녀에게 보내온 눈길의 의미도 같은 뜻이 분명한데 말하지 못한 진실처럼 침묵에 갇혀있다. 답답했다.

 

저기 보이는 산이 생트 빅투아르 산이야.”

데니의 눈길이 창밖을 향했다. 흰 석회암 덩어리가 불쑥 솟은 것 같은 경이로움이 차창을 따라 흘러갔다. 세잔이 그려서 유명해졌다는 생트 빅투아르 산. 미양도 알고 있는 곳이었다.

일요일마다 아빠랑 저 산엘 오르고 있어.”

우리 집 근처에 저 산을 바라볼 수 있는 곳이 있어. 레 로브라고.”

. 거기? 그곳에서 보는 산의 모습은 좀 다르지?”

.”

생트 빅투아르를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데니는 미양의 손을 놓지 않았다. 주제를 벗어나 빙빙 도는 이야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미양도 왜 그동안 자신을 바라보았는지, 지금 이렇게 손을 잡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 묻지 못했다. 기차가 엑상프로방스 역에 도착할 때까지 그는 미양의 손을 놓지 않았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어렴풋이 무언가 알 것 같았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으나 그 마음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기차가 엑상프로방스 역으로 들어서자 미양의 입에서 가벼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데니와 함께 있고 싶은데 핑계가 없었다.

곧 크리스마스 방학인데 그는 미양에게 방학 때 무엇을 할 건지 묻지 않았고, 만나자는 말도 하지 않았다. 기차에서 내린 두 사람은 아쉬운 얼굴로 마주 섰다. 데니가 잡고 있던 손을 풀어주었다.

잘 가.”

짧은 인사말과 함께 그가 돌아섰다. 미양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하늘을 나는 양탄자를 타고 구름 위를 날다가 갑자기 추락한 기분이었다. 왠지 모를 서운함에 코끝이 찡해졌다.

미양아!”

등 뒤에서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였다. 깜짝 놀라 돌아선 그녀는 사람들 틈에서 자신을 찾던 엄마와 마주쳤다. 순간 서러움이 폭풍처럼 밀려왔다.

엄마미양은 길을 잃고 헤매던 아이처럼 엄마 품으로 달려가 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