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회>
“이것 좀 들어요. 울라라~ 마담 킴한테 이렇게 큰딸이 있는 줄 몰랐네.”
할머니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미양에게 오렌지 주스를 내밀었다. 직접 오렌지를 짜서 만든 주스다.
“연락이라도 좀 하고 오지 그랬어요?”
“엄마가 어디 있는지 잘 몰랐거든요.”
할머니는 안쓰러운 눈길로 미양을 바라본다.
“무슨 사정이 있는 것 같은데, 너무 걱정하지 마요. 곧 돌아올 테니까.”
“엄마가 보고 싶어서… 여기가 아파요.”
미양이 가슴을 문지르며 꼭꼭 숨겨두었던 말을 쏟아낸다. 미칠 듯이 엄마가 보고 싶다. 미양은 와락 쏟아지려는 눈물을 참으려고 입술을 깨물었다.
엄마는 운전할 때마다 흥얼거리며 노래를 불렀다. 부드러운 샹송이었지만 듣기 싫었다. 등하굣길의 차 안에서 고문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안 그래도 가슴을 짓누르는 바윗덩어리 때문에 죽을 것 같던 날들이었다.
“엄마. 노래 좀 안 하면 안 돼?”
“어? 미안. 시끄러웠니?”
“그냥 듣기 싫어.”
“근데 어쩌지? 습관이 돼서 그런지 노래를 안 하면 운전을 못 할 것 같아.”
엄마의 목소리는 늘 명랑했다. 그것도 싫었다.
“어머. 미양아. 저기 좀 봐. 아몬드꽃이 활짝 피었어.”
엄마는 매일 지나다니는 프로방스 경치에 흠뻑 빠져있었다. 차창으로 들어오는 바람 한 줄기, 햇살 한 줌에도 감탄하며 행복해했다. 미양은 그런 엄마의 행복이 가소로웠다. 그녀를 볼모로 잡고 엄마가 얻은 행복이 역겨웠다.
시간이 갈수록 엄마가 싫어졌다. 아버지가 여전히 그녀를 미워하고 죄인 취급하는 것도 엄마 탓 같았다. 모녀 사이는 점점 나빠졌다. 미양의 심술이 늘었다. 엄마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툭하면 그날 일을 끄집어냈다. 데니를 집으로 데려온 그녀의 행실을 탓했다. 고리타분하고 꽉 막힌 엄마가 답답했다. 미양은 모든 일이 엄마 탓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날 밤, 엄마랑 아버지가 집에 오지 않았더라면 일이 이렇게 커지지 않았을 거예요. 데니도 곧 이성을 찾았을 테고 미안해하며 돌아갔을 거라고요.’
엄마는 딸의 첫사랑을 잔인하게 짓밟았다. 그러고도 딸의 순결을 지켜낸 것으로 엄마의 의무를 다했다고 자위했다. 미양에게는 순결보다 첫사랑이 더 소중했다. 미양은 죽었다 깨어나도 그 사실을 모를 엄마가 갑갑했다. 할머니가 엄마를 왜 그렇게 미워하고 싫어했는지, 그 마음을 알 것도 같았다.
엄마에 대한 미움이 깊어지자 엄마가 좋아하는 것들이 소름 끼치도록 싫어졌다. 그녀의 책을 빌려서 프랑스어 공부를 하려는 엄마가 가소롭게 느껴졌다. 엄마가 좋아하고 예찬하는 프로방스 날씨와 경치 그리고 문화와 사람들까지 정이 뚝뚝 떨어지게 싫었다.
엄마에 대한 미움은 무시로 이어졌다. 미양은 엄마의 바람대로 공부에 매진하는 대신 엄마에게 모든 짜증과 신경질을 퍼부었다. 엄마와 대화는 사라졌고 말도 꼭 필요한 것만 했다.
“밥 먹을래?”
“네.”
“쇼핑하러 갈까?”
“아니요.”
“오늘 날씨 참 좋지?”
“……”
엄마를 무시하는 일은 간단했다. 공부라는 바람막이 뒤로 숨으면 모든 것이 용서됐다. 엄마의 의견을 깔아뭉개도, 엄마에게 짜증과 신경질을 퍼부어도, 공부 때문이었다고, 핑계만 대면 그만이었다.
미양은 엄마에게 자신의 화를 쏟아내며 그녀의 몸 안에 아버지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 그녀는 아버지와 할머니한테 상처받고 힘들어하는 엄마를 보며, 가슴 아파하던 딸이 아니었다.
오히려 더 악랄하고 치졸한 가해자가 되어서 엄마에게 횡포를 부렸다. 그녀의 변신에 엄마는 속절없이 무너졌다. 엄마는 할머니나 아버지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녀의 기세에 눌렸고, 특유의 침묵으로 일관하며 화를 삭여나갔다.
10
2014년 5월 24일
미양은 마지막 인사를 하듯 투와조모 광장 카페에 앉아 엄마가 사는 스튜디오를 바라본다. 돌이켜보면, 엄마도 이 도시도 잘못한 것은 없었다.
그 당시, 미양에게는 죽도록 미워할 대상이 필요했을 뿐인데, 왜 그녀는 엄마에게 그 원죄를 묻고 분풀이를 했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명료한 진실을 이제야, 이곳에 와서야 알게 되다니…… 미양은 엄마에게 새삼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엄마를 기다리던 며칠 동안 투와조모 광장 카페는 그녀의 아지트였다.
미양은 카페에 앉아 책을 읽으며 차를 마셨고, 프로방스 요리를 먹었다. 신기하게도 프로방스 음식들이 입덧을 가라앉혔다. 공항면세점에서 사온 김치보다 올리브 절임이 더 입에 맞았다. 엄마가 좋아하던 올리브 잼의 고소하면서 짭조름한 맛도 자꾸 그녀의 구미를 당겼다.
이상하게 이곳에 온 순간부터 미양도 엄마가 좋아했던 것들이 하나둘씩 좋아졌다.
미양은 엄마를 기다리는 동안 이웃집 할머니 다니엘과 친구가 되었다. 그녀는 카페에서 엄마를 기다리는 미양의 말동무가 되어주더니 나중에는 엑상프로방스 가이드를 자청하고 나섰다.
어느 가게 올리브 절임이 맛있는지, 올리브 오일은 어떤 것을 사야 좋은지 알려주었고, 아침 시장에서 유명한 맛있는 빵집도 소개해주었다. 대학에서 심리학을 가르쳤던 다니엘의 영어 실력은 훌륭했다. 프랑스어가 어색했던 미양은 고향 친구를 만난 듯 다니엘과 어울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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