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회>
쥬디는 프로방스의 삶을 즐기는 일에도 적극적이었다. 남자친구 앙투완이 니스로 일주일간 출장을 가게 되자, 화숙까지 부추겨서 따라나섰다. 화숙이 젊은 연인 사이에 끼어들기 싫다며 거절해도 소용없었다.
“제발, 숙! 앙투완이 일하는 동안 같이 놀 친구가 없단 말이야. 응?”
화숙은 쥬디의 애교에 넘어가 니스 외곽에 수영장이 딸린 메종을 빌렸다.
“숙! 아직 남편한테 연락 안 했어? 그러다가 정말 헤어지려고?”
쥬디가 머리 위로 쏟아지는 태양을 즐기다가 뜬금없이 화숙의 사생활로 파고든다. 어제저녁, 정원 테라스에서 와인을 마시다 남편이야기를 흘린 것이 화근이었다. 쥬디는 그녀의 남편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했다. 화숙은 가만히 눈을 감고 남편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떠올린다. 그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남편은 솔직하고 밝은 사람이었다.
화숙의 아킬레스건이던 학력콤플렉스를 뛰어넘는 사람이었다. 그녀를 고졸 여사원이 아닌 인간 김화숙으로 대해주었고, 그녀가 얼마나 빛나는 존재인지 알려주던 사람이었다. 그동안 그녀의 외모에 반해 다가왔다가, 고졸에 처녀 가장이라는 처지를 알고 달아났던 남자들과 차원이 달랐다.
화숙과 남편은 같은 회사에 다녔다. 화숙은 자신을 향해 저돌적으로 다가오는 남편이 좋았다. 마음을 표현하지는 못했다. 명문대학 출신에 키도 크고 잘생긴 남자가 자신의 짝이 될 리 없다고 단정 지었다. 상처받고 싶지 않았다. 일부러 도도한 척 그를 외면했다. 뒤늦게 대학입시를 준비하느라 연애를 할 여유도 없었다.
남편은 끈질기게 그녀의 주위를 맴돌았다. 매일 밤늦게까지 화숙이 다니던 입시학원 앞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그녀가 공부하는 정독도서관을 찾아와 밥도 사주었다.
“나랑 결혼하자. 응? 당신한테 대학이 그렇게 중요하면 내가 보내줄게.”
남편이 사랑이 가득한 눈빛으로 청혼했을 때, 화숙은 대답 대신 소주를 마셨다. 소주 3병을 나누어 마신 뒤에도 남편은 계속 혀 꼬부라진 소리로 졸랐다. 자신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고, 홀어머니만 잘 모셔주면 된다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날, 화숙은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취한 남편을 뿌리치지 못했다. 대학까지 보내주겠다며 사랑을 원하는 그를 더는 외면할 수 없었다.
남편과 어색하고 침울한 회색빛 첫 밤을 보냈다. 군데군데 얼룩진 여관방 시트에는 그녀의 처녀가 묻어나지 않았다. 첫 경험의 기억이 암울했다.
남편은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었다. 화숙이 임신을 한 사실을 알고 당장 결혼을 서둘렀다. 시어머니가 결혼을 반대하자 집을 나와 콧대 높은 시어머니의 반대를 꺾었다. 결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시어머니 못지않게 친정엄마의 반대도 심했다. 그녀가 결혼을 고집하자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허탈해했다.
“병신같은 것! 저 죽을 줄 모르고 불로 뛰어드는 불나방 같은 것!”
친정엄마는 화숙의 등짝을 후려치며 안타까운 심정을 토해냈다. 진정으로 친정엄마는 그녀를 걱정했다. 처녀가장인 그녀의 부재로 겪게 될 경제적인 공항상태보다 앞으로 펼쳐질 딸의 고된 삶을 더 걱정했다.
그들이 결혼을 발표했을 때, 여직원들은 모두 패닉상태에 빠졌다. 여상 출신인 화숙이 온갖 여우 짓을 해서 일등 신랑감인 남편을 낚아챘다며 숙덕거렸다. 실제로 화숙의 발목을 잡은 건 남편이었지만 상관없었다. 화숙은 대학을 가려고 모아두었던 돈으로 혼수를 장만하고, 결혼식을 올렸다.
12
다시, 2014년 5월 21일
“오 마이 갓! 숙, 여기 봐! 바닥에 꽃이 피었어.”
생뽈 드 방스에 도착한 순간부터 들떠있던 쥬디가 길바닥을 가리키며 소리를 지른다. 조약돌로 심어놓은 돌꽃들이 화숙의 발아래서 웃고 있다.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골목길이 있다니… 화숙의 가슴도 봄 처녀처럼 두근거린다. 화숙과 쥬디는 어린아이처럼 신나서 생 뽈 드 방스의 골목길을 걷는다. 길 양옆으로는 화사한 갤러리와 아기자기한 부티크가 들어서 있다. 아트갤러리에 걸린 그림과 조각품의 수준도 높아 보인다.
화숙은 이곳을 왜 예술가의 마을이라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부티크에 전시된 샤갈 풍의 기념품들도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 쥬디가 기념품 가게 앞을 떠나지 못하는 화숙의 손을 잡고 언덕 위에 있는 생 뽈 교회로 향한다.
키 큰 종려나무와 어우러진 교회의 돌담이 햇살을 받아서 하얗게 빛나고 있다. 13세기에 지어진 교회는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정갈하다. 쥬디는 교회 주변을 서성이는 화숙을 앞장세워 용감하게 교회 안으로 들어간다. 채광이 잘 된 교회에서는 마침 결혼식이 열리고 있다.
친정엄마의 기우대로 화숙의 결혼생활은 가시밭길이었다. 남편은 일을 핑계로 밖으로만 돌았고, 그녀는 시어머니의 그늘에 갇혀 버렸다. 시어머니는 보잘것없는 화숙을 무시하고 미워했다. 이화여대를 나온 시어머니가 여상 출신 며느리를 들인 것은 일대 사건이었고 수치였다.
“얼마나 처녀 행실이 바르지 못하면 혼전 임신을 했겠니. 가진 게 없으면 배운 거라도 있어야지. 쯧쯧”
시어머니가 조용조용 톤 하나 바뀌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교양으로 무장한 시어머니의 말투는 상대방의 기를 죽이는 힘이 있었다. 능숙한 칼 놀림으로 상대를 쓰러트리는 무사처럼 시어머니는 조용히 화숙을 제압했다.
시어머니는 또, 겉마음과 속마음이 다른 이중적인 사람이었다.
며느리와 단둘이 있을 때와 제삼자가 함께 있을 때, 시어머니의 태도는 180도 달라졌다. 남편 앞에서도 그랬다. 아들이 집에 있을 때는 천사였다가, 출근과 동시에 악마로 변했다. 시어머니의 이론은 단순했다. 살림을 가르치려니 엄한 시어머니가 되어야 하고, 제삼자 앞에서는 며느리 체면을 살려주느라 인자한 시어머니 노릇을 한다고 했다.
집안 살림을 가르친다는 시어머니는 화숙에게 설거지와 청소만 시켰다. 화숙이 혼수로 준비한 남대문시장 표 그릇들이 시어머니가 쓰던 포트메리온 그릇에 밀려난 것처럼, 시어머니의 부엌에는 화숙이 끼어들 자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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