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회>
혼자서 하는 공부는 한계가 있었다. 책에 코를 박고 익힌 발음기호와 간단한 단어 그리고 인사말은 책을 덮기 무섭게 잊어버렸다. 단어 하나를 겨우 외우고 나면 그전에 알았던 단어 두 개를 잃어버리는 느낌도 들었다.
결국, 그녀는 백기를 들었다. 남편에게 어학원에서 프랑스어를 배우고 싶다는 말을 꺼냈다.
“대체 공부에 대한 당신의 열등감은 언제 끝나는 거야?”
프로방스에 와서 남편이 처음으로 언성을 높였다.
짜증이 잔뜩 묻은 남편의 말은 있는 힘껏 화숙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공부에 대한 열등감’이라는 표현은 그녀가 애써 감추고 싶은 치부를 적나라하게 까발린 말이었다. 남편이 날린 폭언의 화살은 아팠다.
“지금처럼 프랑스 말 한마디도 못 하는 벙어리로 살기 싫어요. 혼자서 시장도 못 가는 멍청이로 살고 싶지도 않고요.”
화숙은 화를 억누르며 또박또박 제 생각을 밝혔다. 남편이 한심하다는 시선으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
“어학원은 그냥 가니? 당신이 창피해하는 학벌을 여기서도 떠들고 다닐 거야?”
“그게 무슨 말이에요?”
“어학원 가려면 최종학교 졸업증명서를 내야 한다고. 졸업증명서를 프랑스어로 공증받아야 한단 말이야.”
결국, 그거였다. 남편은 공증절차 때문에 프로방스 대학에서 일하는 선배, 박 교수에게 아내가 고졸이라는 사실을 들키기 싫었던 거였다.
“그러니까 여상 출신인 내가 창피한 거였네요?”
화숙의 목소리가 떨렸다. 남편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또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학벌 콤플렉스가 그녀를 짓눌렀다. 가슴이 터질 것처럼 아팠다. 콧등이 시큰했다. 그에게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무작정 집을 나왔다.
하염없이 엑상프로방스 골목길을 걸었다. 참았던 눈물이 두 뺨을 타고 흘렀다. 이렇게 아름답고 낭만적인 골목길을 걷고 있는 그녀가 너무 작고 초라해서 눈물이 나왔다.
14
피카소미술관을 나서던 쥬디가 엄마에게 보낼 그림엽서를 산다. 피카소의 작품이 인쇄된 엽서들은 그 자체가 예술품이다. 쥬디는 그림엽서들이 모두 마음에 들어서, 어떤 걸 엄마한테 보내야 할지 모르겠다며 행복한 고민에 빠져든다.
화숙은 그런 쥬디를 바라보며 미양에게 보낸 엽서를 떠올린다. 간지러운 햇살이 쏟아지던 마라보 거리 카페에 앉아 음악을 듣던 날이었다. 울컥하는 감상에 빠져서 엽서를 썼다. 괜히 치기 어린 엽서를 보낸 것은 아니었을까 잠시 후회가 된다.
5개월 전, 화숙은 프로방스로 떠나오면서 모든 인연을 끊으려 했다. 그 누구와도 연락하지 않았다. 이메일도 확인하지 않았다. 가끔 가족들이 보고 싶어도 모질게 참아냈다.
남편을 마음으로 정리할 때까지 모든 관계를 원점에 두고 있었다. 그런데 어쩌자고 미양에게 엽서를 보냈는지 모르겠다. 이미 결혼해서 남의 식구가 된 딸. 살가운 대화보다 툭툭 거리고 싸우기만 했던 딸이다. 그래도 보고 싶은 마음은 감출 수 없었나 보다.
그랬다. 화숙은 처음으로 미양을 느꼈던 날, 그날의 애틋함을 아직도 잊지 못했다. 화숙에게 미양은 절망의 끝에서 만난 삶의 희망이었다.
화숙의 배가 불러오면서 시집살이도 누그러졌다. 손주에 대한 욕심이 시어머니를 부드럽게 변화시켰다. 은근히 아들 손주를 원했지만, 화숙이 딸을 낳았다고 실망하거나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화숙의 산후 조리를 해주겠다고 나섰다.
“말씀은 고맙지만, 몸조리는 친정에서 해야지요.”
“아닙니다. 우리 집안일인데, 당연히 저희가 해야지요.”
친정엄마는 시어머니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가난한 집안에서 딸을 시집보낸 자격지심 때문이기도 했다.
시어머니는 특유의 부지런함으로 화숙과 아기를 보살폈다. 애지중지 손녀를 씻기고 먹이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산후조리가 끝난 뒤에도 시어머니는 온종일 손녀를 품고 살았다. 며느리가 집안일을 하는 사이에 손녀를 봐준다는 핑계였다. 화숙이 아이를 차지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은 젖을 먹일 때뿐이었다. 손녀를 향한 할머니의 사랑은 나날이 깊어갔다. 더불어 집안에 웃음꽃이 가득했다. 미양은 존재 그 자체로 기쁨이고 행복이었다.
미양이 가져온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우리 미양이 하는 짓이 꼭 남동생을 볼 상이야. 어미야, 빨리 둘째도 낳아야지?”
미양의 돌잔칫날, 시어머니는 노골적으로 아들 손주 욕심을 드러냈다. 남편은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렸다.
그날 이후, 아들 손주를 향한 시어머니의 집요한 채근이 시작됐다. 시어머니의 성화 때문이 아니라도 화숙은 둘째를 갖고 싶었다. 그런데 미양을 낳은 후로 임신이 되지 않았다. 불임클리닉을 다녀도 효과가 없었다. 이런저런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수많은 검사와 시도를 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시어머니 입에서 며느리가 잘 못 들어와서 대가 끊어졌다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아기를 못 갖는 것이 며느리만의 잘못이 아닌데, 모든 미움과 책임은 오롯이 화숙의 몫이었다. 며느리의 자존심을 지켜준다며 아무도 모르게 가해지던 시집살이가 담장 밖을 넘기 시작했다.
남편은 화숙이 당하는 시집살이를 못 본 척 눈감아버렸다.
“할머니 미워! 매일매일 엄마만 구박하고. 할머니 미워! ”
화숙의 고된 시집살이를 보다 못한 미양이가 울음을 터트렸을 때, 남편은 시어머니 편을 들었다. 남편은 늘 그랬다. 화숙을 방패삼아서 시어머니로부터 도망치고, 존재하지 않을 아이 문제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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