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회>
화숙은 부끄럽고 창피했다. 울컥 솟구치는 화도 참을 수 없었다. 이러다 길거리에서 딸의 뺨을 후려칠 것 같았다. 그녀는 침울한 얼굴로 돌아섰다. 택시를 잡았다. 그제야 상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미양이 화숙을 붙잡았다. 이미 그녀의 마음은 꽁꽁 얼어붙었다.
택시에 몸을 실은 화숙은 딱히 갈 곳이 없었다. 집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무작정 남편 회사로 갔다. 남편이 보고 싶었다. 야근해야 하는데 귀찮게 한다고 신경질을 부려도 남편과 저녁을 먹으며 마음을 풀고 싶었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화숙은 남편의 여자를 보았다.
택시에서 내리던 그녀는 회사 앞에 서 있는 남편을 보았다. 혹시, 미양이가 남편에게 미리 전화를 한 것일까. 화숙은 괜히 들뜬 마음에 가슴이 뛰었다.
“여보.”
남편을 부르는 그녀의 목이 살짝 멨다. 그와 동시에 은회색 아우디가 부드럽게 다가와 남편 앞에 섰다. 기다렸다는 듯이 남편이 차에 올랐다. 운전석에 앉은 여자가 안전띠를 매는 남편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여자가 장난스럽게 남편의 코를 비틀었다. 남편은 껄껄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여자의 차가 떠났고, 화숙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한참을 그러고 있던 화숙이 부르르 떨리는 손으로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았다. 대신 문자가 왔다. 지금 야근 중이라 바쁘니까 급한 일이 아니면 집에서 이야기하자는 내용이었다.
“당신은 여자 만나면서 야근해요?”
화숙의 말에 잔뜩 가시가 돋쳤다. 남편은 뻔뻔한 얼굴로 거래처 사장과 야근을 나갔다고 했다. 거래처 여사장의 비위를 맞추어 준 것뿐이라고 변명했다.
“큰일 앞두고 웬 소란이냐?”
시어머니가 끼어들었다. 화숙이 남편에게 말도 안 되는 시비를 건다며 화를 냈다. 시어머니 자신이 누명을 쓰고 의심을 받은 것처럼 불쾌해했다. 전세가 기울었다. 시어머니는 집안의 대를 끊어놓고 뭘 잘했다고 남편을 투기하느냐, 며 화숙을 나무랐다.
“최 씨 집안 남자들은 시앗도 보지 않는다. 네 남편, 내가 그렇게 아들 타령을 해도 밖으로 눈 한번 안 돌리는 위인이야. 그런데 바람을 피운다고?”
시어머니의 호령에 화숙은 움찔했다. 어쩌면 남편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그녀가 오해한 것일 수도 있다. 더구나 딸의 결혼식이 코앞이었다. 괜한 오해로 분란을 일으키다가 남편의 체면을 구겨서는 안 될 일이었다. 딸은 물론이고 사위와 사돈댁에서 안다면 두고두고 흉을 잡힐 일이었다.
화숙은 과감하게 의심의 꼬리를 잘라냈다. 밖에서 아들을 낳아오라는 시어머니의 요구를 단칼에 무시할 정도로 남편은 그녀를 사랑하니까, 성실하고 올바른 사람이니까 더는 그를 의심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16
2014년 5월 24일
화숙은 쥬디가 일광욕을 즐기던 알롱제 의자에 피곤한 몸을 기댄다. 밤하늘에는 보석을 뿌려놓은 듯 별들이 가득하다. 화숙은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별들을 바라보다가 크게 심호흡을 한다. 차가워진 밤공기가 기분 좋게 상쾌하다.
파티는 이제 주최자의 손을 떠났다. 쥬디와 앙투완은 점점 늘어나는 손님을 감당하지 못해 근처 호텔로 도망갔다. 화숙도 수영장으로 몸을 피한지 오래다. 그나저나 파티 뒷정리는 또 언제 할지 모르겠다. 화숙은 질끈 눈을 감는다.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눈을 뜬 화숙은 주위를 둘러본다. 알롱제 의자에서 깜박 잠이 들었나 보다. 화들짝 놀라 일어나는데 그녀를 감싸고 있던 두꺼운 점퍼가 툭 떨어진다. 미셸의 점퍼다. 파티가 끝났는지 소음 같던 음악도 들리지 않는다.
화숙은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따라 나선다. 희미한 불빛 아래서 미셸이 빈 술병들을 치우고 있다. 화숙과 눈이 마주치자 미셸이 어깨를 으쓱하며 겸연쩍은 미소를 짓는다.
찡하니 마음 끝이 저려온다. 미셸은 이런 사람이다. 남들이 귀찮아하는 일을 내 일처럼 묵묵히 하는 사람.
“나도 도울게요.”
“잘됐다. 혼자 심심했는데.”
미셸이 햇살처럼 환하게 웃는다. 순간 화숙은 정신이 번쩍 든다. 잘못하다 그동안 그를 피해 다닌 일이 수포로 돌아갈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뒷정리를 끝낸 화숙과 미셸은 수영장에 나란히 놓인 알롱제 의자에 잠자리를 마련했다. 방과 거실은 이미 만취해서 잠든 앙투완 친구들로 가득하다. 새벽이 되자 기온이 더 내려간다. 방에서 이불을 가져다 덮었어도 으스스 몸이 떨린다.
미셸이 춥다고 엄살을 부리며 알롱제 의자를 화숙과 가깝게 붙인다. 금방 곯아떨어질 것처럼 피곤했던 화숙이 화들짝 놀라 일어선다. 남편이 아닌 남자와 이렇게 가깝게 눕기는 처음이다.
“왜 그래요?”
“잠이 안 올 것 같아서요.”
화숙이 둘러대며 말했다.
“그럼 우리 바닷가로 놀러 갈래요?”
미셸은 화숙의 대답도 듣지 않고 주섬주섬 짐을 챙긴다. 덮고 있던 담요와 먹을 것을 차에 싣고 그녀의 손을 잡아끈다.
“안 잡아먹어요.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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