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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방스 소설쓰기

따로 또 같이 프로방스를 걷다 24회

 

 

 

<24>

 

화숙은 쥬디가 주최하는 파티에서 미셸을 처음 만났다. 앙투완의 상사인 그는 올드한 데니 분 인상을 풍겼다. 알랭 드롱처럼 잘생긴 얼굴은 아니지만 친근하면서도 젠틀한 느낌이었다.

 

“3년 전에 한국으로 출장을 다녀왔어요. 어메이징한 나라더군요.”

그는 고향 친구를 만난 것처럼 화숙을 반갑게 대했다. 서로 소개를 하다 보니 나이도 비슷했다. 미셸은 화숙이 자기보다 10살은 어린 줄 알았다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동양여자들이 어려 보인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이럴 줄은 몰랐다며 흥분했다.

화숙은 희끗희끗한 새치가 어우러진 그의 회색 머리가 마음에 들었다. 짙은 눈썹에 그늘지도록 긴 속눈썹과 청회색 눈동자도 묘한 매력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그는 프로방스에서 만난 또래 친구일 뿐이었다.

그래서 부담 없이 어울려 다녔다. 쥬디네 집에서 파티를 할 때마다,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에 대해 조금씩 알아갔다. 쥬디네 커플과 함께 맥주를 마시기도 했다. 작은 도시 엑상프로방스를 걷다가 우연처럼 만나 커피를 마시기도 했다. 또래라는 공감대 탓인지 말도 잘 통했다.

 

이혼한 아내와는 일 년에 두 번, 아이들 생일 때마다 만나요.”

그는 솔직했다. 이혼한 아내 이야기는 물론이고 얼마 전까지 동거하다가 헤어진 여자친구 이야기도 아무렇지도 않게 가벼움을 가장해서 털어놓았다. 대신 화숙의 사생활은 묻지 않았다. 그녀가 왜 가족들과 떨어져서 낯선 프로방스에 혼자 사는지 알려고 하지 않았다.

 

미셸의 생일파티가 열리던 날이었다. 화숙은 그를 위해 한식을 준비했다. 생일케이크를 자르고 샴페인을 마시고 분위기가 고조됐다. 누군가 진실 게임을 하자는 제안을 했다.

당신이 왜 이곳에 사는지 알고 싶어요.”

미셸이 화숙의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 바캉스를 즐기는 중이에요.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바캉스.”

화숙이 당황한 표정을 감추며 말했다.

앙투완이 손뼉을 치며 브라보를 외쳤다. 쥬디도 부럽다는 몸짓으로 화숙의 어깨를 껴안았다. 화숙은 미셸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풀리는 것을 보았다. 허공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쳤다. 미셸이 쾌활한 웃음을 머금고 일어섰다.

당신의 바캉스를 위해 건배

모두 신 나는 목소리로 건배를 외쳤다. 그때 누군가 미셸을 향해 윈느 샹송을 외쳤다. 노래해. 노래해. 아이들처럼 테이블을 두드리며 미셸에게 노래하라고 소리를 지르며 웃었다.

미셸은 기타를 치며 조르주 무스타키의 노래를 불렀다. 음유시인 같은 그의 분위기와 꼭 맞는 노래였다. 노래를 부르는 동안 미셸의 시선은 노골적으로 화숙을 향했다. 음울한 아름다움이 샹송을 타고 흘렀다. 영혼을 울리는 소리였다.

 

그의 노래는 화숙을 흔들었다. 노래에는 노골적인 그의 관심이 담겨있었다. 그의 마음을 받고 싶었다. 남편에게 복수하는 마음으로 그를 만나고 싶었다. 뒤늦게 찾아온 낯선 감정이 신기했다. 사랑일지 몰랐다. 아니 사랑 같다. 놓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다. 그러나 사랑이 가벼울 수 없다는 것을 화숙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도덕적인 관념이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그날 이후, 화숙은 미셸을 피해 다녔다. 친구들도 어색해진 두 사람의 일을 쉬쉬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나 큰일이 있었던 것처럼, 두 사람 사이를 안타까워했다.

 

파티 분위기는 자유롭다. 모여앉아 이야기를 나누다가 음악이 나오면 춤을 추고, 술을 마시고 싶으면 건배를 외친다. 와인도 레드, 로제, 화이트 색깔별로 취향대로다. 한쪽에서는 맥주를 그리고 다른 한쪽에서는 테킬라를 마시며 웃고 떠든다.

처음에 일곱 명으로 시작한 파티가 점점 커졌다. 앙투완이 니스에 사는 친구를 부르고, 그 친구가 또 친구를 부르는 식으로 점점 많은 손님이 메종으로 모여들고 있다.

조촐한 파티를 기대했던 화숙은 시끄럽게 변해가는 파티가 피곤해졌다. 와인을 3잔이나 마셔서 그런지 몸도 노곤하다. 터져 나오는 하품을 참느라 화숙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눈물 때문에 흐릿해진 시야로 호탕하게 웃고 있는 미셸이 보인다.

 

박사과정을 밟던 미양이가 갑자기 학교를 그만두고 취직을 했다. 가족의 거센 반대도 소용없었다. 거기다 한술 더 떠서 결혼을 하겠다고 나섰다. 다행히 동아리 선배라며 데려온 사위는 한 눈에도 내 사람이다 싶었다. 마음에 쏙 들었다.

시어머니와 남편도 사위를 만족해했고, 사돈댁에서도 미양을 좋아했다. 혼인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화숙은 딸의 혼수를 준비할 꿈에 부풀었다. 대형냉장고부터 쓰레기통까지 신혼살림에 필요한 리스트를 작성하고 시댁에 보낼 예단도 알아보러 다녔다. 그러다가 세일 중인 대형 김치냉장고를 덜컥 샀다.

미양이가 알아봐 달라고 부탁한 모델보다 훨씬 크고 좋은 것이었다. 값도 저렴했다. 이것만 있으면 맞벌이를 하는 딸에게 김치와 반찬들을 넉넉하게 가져다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엄마 미쳤어? 왜 엄마가 내 물건을 함부로 사? 그거 월권인 거 몰라? 그냥 어떤 제품이 좋은지 알아보랬지 누가 엄마한테 사라고 했어?”

저기, 미양아

그게 신혼집에 어울린다고 생각해? 센스도 없으면서 왜 엄마가 나서? 아유~ 정말 짜증 나! 난 몰라. 엄마가 사고 친 거니까 엄마가 알아서

퇴근하는 딸과 저녁을 먹으러 가던 길이었다.

김치냉장고를 샀다는 말을 듣자마자 미양이 속사포처럼 신경질을 쏟아냈다. 화숙이 뭐라 변명할 틈도 없었다. 쩌렁쩌렁한 미양의 목소리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힐끔거리며 그녀를 쳐다봤다. 측은한 그들의 시선이 무섭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