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들과 함께 걷는다 - 아흘 산책
아흘 산책을 나선다. 지금까지 아흘을 몇 번 갔었지만 버스를 타고 가는 것도,
이번에는 제대로 아흘을 느끼면서 산책을 하자고 마음을 먹은 것도 처음이다.
그런데 엑스에서 아흘까지 가는 버스시간표가 참 복잡하다. 요일별로, 계절별로
변하는 버스시간을 자세하게 적어놓은 것이 나 같은 초보자를 더 헷갈리게 만든다.
그래도 다행인건 우리가 약속을 잡은 목요일은 주말이 아니라 버스시간변동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오늘 산책길은 서울에서 놀러온 선배들과 함께한다. 내 선배들은 비실비실한 나를 믿고
프로방스 여행을 떠나온 용감한 분들이다. 프로방스의 매력에 푹 빠진 그들은 반 고흐가
머물렀던 아흘을 찾아간다는 설렘으로 눈빛이 초롱초롱하다.
우리는 엑스에서 출발하는 7시55분 버스를 탄다. 버스는 프로방스의 풍경을 가로지르며 달린다.
그리고 살롱 드 프로방스를 거쳐서 1시간 20분 만에 아흘에 도착한다.
아흘 산책을 앞두고, 내 어깨가 살짝 무거워졌다. 마치 아흘 홍보대사라도 된 것처럼 선배들한테
아흘을 속속들이 보여주고 싶은 욕심에 인터넷을 뒤적거리며 이런저런 정보를 수집했다.
집에 있는 아흘지도까지 알뜰하게 챙겼다. 그런데 막상 아흘에 내리니 어리벙벙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다.
종점이라고 내려준 곳은 버스터미널 건물도 없는 길거리다. 버스운전수에게 엑스로 돌아가려면
어디서 버스를 타야하느냐고 물으니 길만 건너가서 타란다. 그런데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여기가 어딘지 감이 안 잡힌다. 지도를 펴들고 근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을 찾아간다.
‘지금 제가 어디 있는지 알려주실래요?’
어여쁜 아흘의 여인이 길 잃은 한국여인들을 위해 친절하게 길을 알려준다.
그 바람에 아흘의 여인이 마시려던 커피를 쏟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민망해서 그녀를 바라보니 커피를 쏟은 건 자신이니 괜찮단다. 아흘의 여인은 마음도 참 곱다.
그녀가 지도에 표시해준 길을 따라 3분쯤 걸으니 익숙한 길이 눈에 들어온다. 이 길은 아흘의 메인도로
조지 끌레멍쏘(Boulevard Georges Clemenceau)다. 2007년 12월, 처음으로 아흘여행을 왔을 때
바글바글 큰 시장이 섰던 길이다. 매주 토요일마다 열리는 아흘시장은 프로방스에서 제일 큰 시장으로
유명하다. 규모가 얼마나 컸던지 지금까지도 내게 아흘은 큰 시장으로 기억될 정도다.
나는 선배들에게 자신 있게 조금만 더 가면 관광정보센터 오피스투히즘이 나온다고 알려준다.
선배들을 위해 오피스투히즘에서 지도를 챙겨들고 나온다. 이제 횡단보도를 건너
쟝 조헤(Jean Jaures)길을 지나 헤퍼블릭광장(Place de la republique)으로 가면 된다.
그런데 쟝 조헤길로 들어서자마자 화려한 쌍똥(Les santons)가게가 보인다.
프로방스의 전통도자기인형인 쌍똥은 성탄절을 기념하는 예술작품으로 양치기, 투우사, 교사 등등
다양한 직업을 묘사한 인형이다. 매년 아흘을 비롯한 프로방스에서는 11월 중순부터 1월 중순까지
쌍똥예술가들이 만든 작품이 전시, 판매되고 있다. 이곳 사람들은 크리스마스 때마다
쌍똥을 사서 모으는 전통이 있다는데, 예술작품이라 값은 조금 비싼 편이다.
아흘의 쌍똥가게에는 참 다양한 직업을 가진 인형들이 전시되어 있다. 어부, 농부, 요리사, 갹송...
그런데 한쪽 귀를 붕대로 감은 채 그림을 그리고 있는 반 고흐인형도 전시되어있다.
역시 아흘답다. 20센티 정도 크기의 반 고흐인형이 140유로다.
우리는 쌍똥가게를 지나 헤퓌블리크(Republique) 광장으로 간다. 광장 중앙에는
오벨리스크(obelisque d‘Arles) 분수가 있고, 그 주위를 시청건물(Hotel de vill d'Arles)과
생 트로핌교회(L'eglise St Tromphime)가 감싸고 있다.
우리는 잠시 오벨리스크 분수 주위를 걷다가 생 트로핌교회로 간다.
로마유적이 대부분인 아흘에서 유일하게 중세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이 교회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향하는 순례길에 있어서 중세 때 순례자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았던 곳이란다. 성당 입구에 새겨진 최후의 심판조각이 훌륭하다.
우리는 교회 맞은편에 있는 시청으로 발길을 돌린다. 겉모습은 어느 도시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시청 건물이지만 이 안에는 대단한 역사가 숨어있다. 바로 시청 지하에 있는
고대로마시대 유적 크리뽀또히띠크 (Crypotorique du Forum)다. 시청로비를 지나 지하로
들어선 순간 타임머신을 타고 고대로마시대로 돌아간 듯한 착각이 드는 곳이다.
그런데 선배들의 표정이 덤덤하다. 아흘의 로마유적에 별로 감흥을 안 보인다.
여행은 개인의 취향에 따라서 달라진다. 죽어라 여행지의 볼거리를 찾아다니는
여행자가 있는가하면 그냥 여행지의 분위기를 느끼는 것을 더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다.
내 선배들의 스타일은 중간 정도. 유명 볼거리를 대충 둘러보고, 카페에 앉아 여행지의
분위기를 가슴으로 느끼는 것을 더 즐긴다. 그러니까 선배들은 처음부터 아흘을 구석구석
둘러볼 욕심이 없었다. 그냥 아흘을 산책하다가 반 고흐의 흔적을 느껴보는 것으로 만족한단다.
우리는 시청을 지나 왕궁거리(Rue de palais)를 걷는다. 거리는 어느 새 관광객들로 가득하다.
활짝 문을 연 부띠끄들 사이로 블랑제리들도 보인다. 갓 구운 빵과 케이크들이 먹음직스럽게
진열되어있다. 우리는 자석에 끌리듯 블랑제리로 들어가 각자 취향대로 빵과 케이크
그리고 타르트를 고른다. 벌써부터 입안에 침이 고인다.
블랑제리를 나와 시인 프레드릭 미스트랄의 동상이 있는 포름광장(Place du forum)으로 발길을 돌린다.
미스트랄은 프로방스 사랑이 유난했던 시인이다. 프로방스어로 시를 썼고,1904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자
이 상금을 기본으로 박물관(Museon Arlaten)을 세워서 프로방스의 민속과 언어보호에 앞장 선 사람이다.
그런데 지금 이 광장은 시인 미스트랄보다 화가 반 고흐 때문에 더 유명하다.
이 광장에는 반 고흐의 카페 ‘카페 라 뉘(cafe la nuit)’가 있다. 반 고흐의 그림 <밤의 카페테라스>로
더 유명한 곳이다. 카페 전경은 그림속의 모습과 똑같다. 밤이 아닌 오전 시간이라 그런 가, 카페 분위기가
조금 어수선하다. 옆에 있는 카페들도 마찬가지다. 갹송들이 광장에 천막을 치고 테이블과 의자를
가져다놓으며 부지런히 오픈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우리가 테이블에 앉자 나이가 들어보는 갹송이 익숙한 표정으로 ‘카푸치노’를 마실 거냐고 묻는다.
에스프레소커피에 익숙하지 않은 동양관광객들을 많이 만난 것 같다. 선배들은 오케이, 카푸치노를
주문하고 나는 내 취향대로 에스프레소를 달라고 한다. 우리는 고흐를 추억하며 케이크와 함께
커피를 즐긴다. 쓴 에스프레소 커피와 달콤한 케이크가 어우러지는 맛이 환상이다.
입안이 즐거우니 저절로 행복해진다. 여자들의 수다도 길어진다.
(‘카페 라 뉘(cafe la nuit)’의 실내풍경. 겉모습과 달리 고전적인 느낌이다.)
카페에 앉아 있는 동안 수많은 카메라세례를 받았다. 끝도 없이 관광객들이 지나가면서 반 고흐의 카페를
향해 카메라셔터를 누른다. 더 이상 카페에 머물렀다가는 전 세계 관광객들의 사진모델이 될 판국이다.
우리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4세기에 지어졌다는 꽁스탕텡 공중목욕탕(Thermes de Constantin)을 지나
혼(Rhone)강가로 간다. 도시에서 바라 본 혼 강변은 강둑이 높다. 아비뇽처럼 강을 따라 걷기에 좋은
분위기는 아니다. 아비뇽 강변 풍경이 공들여서 화장을 한 여인이라면 아흘은 머리는 부스스하고
세수도 안한 여자 같다. 그런데 아비뇽과 달리 미스트랄이 심하게 불지 않는다. 왜 그런지 모르겠다.
혼 강을 따라서 불어오는 바람 미스트랄이 왜 아비뇽보다 아흘에서 순하게 느껴지는지, 어쩌면
나 혼자만의 느낌인지 모르겠다. 예전에 아비뇽과 아흘을 같은 날 간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그랬다.
물론 시간대가 달라서 정확한 비교를 할 수는 없지만 아비뇽에서 미친 듯이 불어대던 미스트랄이
아흘에서는 순한 바람으로 바뀌었던 경험이 있다. 오늘도 아흘에는 미스트랄이 기분 좋게 불고 있다.
강둑을 따라 걷던 우리는 적당한 곳에서 길을 건너 도시로 들어간다. 이제부터 아흘의 골목길을
더 가까이 느끼면서 산책하려고 한다. 나는 우선 들고 있던 지도를 가방에 넣는다.
지도와 별로 친하지 않은 스타일이라 그런 가, 지도를 보고 길을 확인하면서 걷는 일이 즐겁지 않다.
여행자의 기본도 모른다고 하겠지만 여행은 내 마음대로, 내 취향대로 하는 거다.
초록은 동색이라고 했던가. 내 선배들도 마찬가지다. 대신 우리는 천천히 골목길을 걸으며
느낌의 감각을 열어놓는다. 작은 골목길의 낡은 돌집들, 창틀에 탐스러운 꽃 화분을 매달린 집,
티테이블이 앙증맞은 작은 카페 앞을 지날 때마다 프로방스를 가슴에 담아가는 것처럼 즐거워진다.
우리들처럼 골목길을 서성이는 관광객들과 미소로 인사를 나누는 일도 재미있다.
미로 같은 골목길이지만 곳곳에 표지판이 있어서 길을 잃을 걱정도 없다.
이렇게 골목길을 걷다보니 어느새 로마시대 투기장이었던 앙삐테아트르(Amphitheatre) 앞이다.
기원전 1세기에 건설된 앙삐테아트르는 로마시대의 투기장으로 60여개의 아치로 이루어져있다.
2만 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앙삐테아트르는 프로방스 지역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보존도
잘 되어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예전에 이곳에서 노예를 희생물로 선혈이 낭자한 경기가 펼쳐졌다는데
지금은 이곳에서 부활절부터 9월까지 투우경기가 열린다. 아흘의 투우는 스페인과 달리 소를 죽이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흰옷을 입은 투우사들이 소뿔에 달아놓은 장식을 잡아채는 것으로 승부를 가른다니
참 괜찮은 투우라는 생각이 든다.
아흘에서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한 앙삐테아트르, 경기장의 맨 꼭대기로 올라가면 눈이 시리도록 파란 하늘과
어우러진 아흘 시내를 훤히 볼 수 있다. 그러나 선배들은 무방비상태로 쨍쨍한 프로방스 햇살에
노출되는 것이 두려운가보다. 선글라스만 낀 나와 달리 선글라스에 모자까지 쓰고도 높은 곳에
올라가고 싶지 않단다.
우리는 대신 앙삐떼아트르 근처 골목길을 어슬렁거린다. 정갈한 골목길마다 꽃들이 활짝 피었다.
저절로 산책을 하고 싶어지는 길이다. 예쁜 것만 보면 입가에 미소가 감돌고, 하나둘셋 김치~하면서
사진을 찍고 싶은 건 어쩔 수 없는 여자들의 감성인가보다. 우리는 골목길에 서서 마음껏 폼을 잡으며
사진을 찍는다.
원형투기장을 한 바퀴 돌고나서 고대극장(Le theatre antique)으로 발길을 옮긴다.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기가 억울할 정도로 황량한 고대극장은 여름공원(Jardin d'ete)과 맞닿아있다.
기원전 1세기에 지어진 이 로마시대 극장은 지금 토대와 기둥 2개만 남아있는 쓸쓸한 모습이다.
무대 뒤쪽의 흔적을 살펴보며 한때 이 극장이 관객을 1만 명이나 수용했던 대극장이었다는 상상을
하는 것이 전부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콘서트도 자주 열리고 8월에는 로마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상영하는 영화제도 열린다. 우리는 여름공원에 앉아서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담장 너머로 고대극장을
바라본다. 고대극장 입구에는 이탈리아에서 온 단체관광객들이 서 있다. 입장료를 아끼려는지,
그들도 극장 밖에 서서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있다.
여름정원풀밭에 앉아 해바라기를 하던 우리는 다시 산책을 시작한다.
기념품가게들이 산책길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ㅈ선배가 프로방스풍 식탁보에 관심을 보인다.
식탁보는 아비뇽이 싸다는 정보를 알려주려는데, 허걱! 세일을 한다며 가게 앞에 써 붙인 가격이 엄청 싸다.
선배는 아비뇽보다 식탁보 값이 더 싼 것 같다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후다닥 가게로 들어간다.
가게 안은 온통 알록달록한 식탁보천지다. 후덕하게 생긴 주인아주머니가 활짝 웃는 얼굴로 다가온다.
봉쥬흐~ 봉쥬흐~ 우선 다정하게 인사를 주고 받은 뒤, 우리는 식탁보며 앞치마, 프로방스풍 옷들을
하나하나 구경한다.
“와~이거 너무 예쁘다. 얼만지 물어봐줘”
“이건 또 뭐하는 거야? 값도 같이 물어봐줘.”
“이거 깎아줄 수 있는지 물어봐줄래?”
나는 프랑스어를 모르는 선배와 프랑스어밖에 모르는 주인아주머니 사이에서 통역을 하느라 정신이 없다.
그런데 잠시 후, 두 사람 사이에 재미있는 상황이 벌어졌다. 선배가 앞치마를 들고 한국말로 이건 얼마예요?
이거 깎아줄 수 있나요? 하고 묻자, 내가 통역을 하기도 전에 주인아주머니가 프랑스어로 ‘13유로인데 절대로
깎아줄 수 없다’는 말을 한다. 그러더니 계속 두 사람의 질문과 답변이 이어진다.
선배는 한국말로 주인아주머니는 프랑스어로... 신기하게도 상황이 딱딱 잘 맞아 떨어진다.
선배가 올리브가 그려진 식탁보에 계속 관심을 보이자 주인아주머니가 재빨리 5분만 기다리면
예쁘게 바이어스를 달아준다며 바로 작업을 시작한다. 이제 그만 물건을 뒤적거리고 이쯤에서
지갑을 열라는 것 같다. 그래도 이 상황이 기분 나쁘지 않으니 참 대단한 상술이다.
즉석에서 재봉틀을 돌리는 아주머니에게 슬쩍 선배가 한 우리나라말을 이해했냐고 물어본다.
대답은 ‘농’ 그러나 말은 이해 못했지만 상황은 이해했다며 웃는다.
주인아주머니가 직접 만들어서 파는 식탁보는 가격도 싸고, 질도 괜찮아 보인다.
이만하면 손님 입장에서도 손해 볼 것 없을 것 같다. 식탁보를 산 선배는 두고두고
이 식탁보를 보면서 프로방스를 기억할 것 같다며 행복해한다.
식탁보가게를 나온 우리의 산책이 다시 이어진다. 우리들의 수다도 다시 시작된다.
ㅈ선배와의 인연이 벌써 20년이다. 우리는 아침마당구성작가와 출연자로 만났고 방송이
끝난 뒤에도 가끔씩 만나서 차를 마시고 밥을 먹으며 친해졌다.
시트콤과 드라마작가로 또 여러 권의 소설책을 낸 소설가로 엄청난 필력을 자랑하는 선배는
내가 부러워하면서 닮고 싶어 하던 사람이다. 복도 어찌나 많은지 성실하고 능력 있는 선배남편은
세상이 다 알아주는 애처가고, 명문대출신인 아들, 딸은 사회적으로도 출세했지만 예의바르고
따뜻한 마음을 지닌 아이들로 자랐다. 나는 이 모든 것이 선배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결과라는 것을 안다.
선배는 스스로를 예민하고 소심한 겁쟁이라고 평가한다. 물론 그런 면도 있지만 내게는
거침없으면서도 따뜻한 성격을 가진 사람으로 느껴진다.
우리 아이가 대학에 합격했을 때였다. 주변에서 한결같이 축하를 해주면서 아들이 대학에 합격했으니
한턱내라는 말을 했다. 우리 정서로는 당연한 인사다. 그런데, 선배는 달랐다. 한턱내라는 말 대신
아들 뒷바라지하느라 고생했다면서 맛있는 밥을 사주었다. 그 후, 나도 선배의 따뜻한 마음을 배워서
기쁜 일을 맞이한 친구나 후배들에게 수고했다면서 밥을 사주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중이다.
재잘재잘 쫑알쫑알 수다를 즐기며 걷는 아흘의 골목길이 더 정감 있다. 그런데 아까부터 ㅅ선배가 조용하다.
조용하고 차분한 ㅅ선배는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일이 여행이란다. 잠을 자다가도 불쑥 어딘가로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낄 정도로 여행을 좋아한다는데 말수가 없고 말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단다.
하하하 조용한 ㅅ선배가 수다쟁이들과 산책을 하려니 고역일 것 같다. 그래도 빙그레 미소를 띤 얼굴로
우리들의 수다를 들어주고 있다.
수다가 너무 심했는지 배가 고프다. 그러고 보니, 벌써 12시가 훨씬 지났다.
그런데 우리는 선뜻 레스토랑을 찾을 엄두가 안 난다. 선배들이 프로방스 음식과 별로 친해지지
못한데다가 두 시간 넘게 점심고문에 시달릴 일이 걱정이기 때문이다. 프로방스에서 로맨틱한 식사를
꿈꾸며 하늘하늘한 원피스에 챙이 넓은 모자까지 가져온 ㅈ선배는 몇 번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는 동안
프랑스음식에 실망, 대 실망을 했단다. 프랑스요리를 흉보자는 건 아니지만 나도 선배의 생각에 동감한다.
(물론 우리가 프랑스 최고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안 해서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우리는 간단하게 점심을 먹기로 하고 샌드위치를 파는 카페를 찾았다. 마침 근처에 먹음직스러운
샌드위치가 진열된 카페가 보인다. 우리는 커피와 함께 빠니니와 샌드위치, 피자를 골고루 주문했다.
가게 앞에 놓인 옹색한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려는데, 주인아저씨가 뒷마당에도 테이블이 있단다.
길거리보다는 낫겠지 하면서 들어간 뒷마당은 완전대박이다. 높고 웅장한 건물들 사이로 난 작은 마당은
로마의 유적지를 방불케 한다. 유적지에서의 식사라...예상치도 못했던 보너스를 받은 기분이다.
우리는 마당 테라스에서의 맛있는 점심을 먹으며, 우리 뒤에 앉은 젊은 커플의 애정행각을
슬쩍슬쩍 바라보며, 행복한 식사시간을 즐긴다. 반 고흐가 예찬한 프로방스의 태양이 거침없이
우리 곁으로 파고든다. 참 따뜻한 느낌이다.
다시 아흘 산책을 나선다. 지금부터 가고 싶은 곳은 반 고흐 에스빠스. 예전에 고흐가 입원했던
정신병원이 있던 자리다. 가만있자, 여기가 어디쯤이지...카페를 나와 몇 걸음을 걷던 나는
아무래도 지도를 꺼내서 거리를 확인해야겠다며 가방을 열었다. 어? 그런데 길이 낯설지 않다.
얼른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바로 조~오기가 반 고흐 에스빠스다.
비운의 화가 반 고흐는1888년 2월 21부터 이듬해 5월까지 아흘에서 살았다.
동생 태호의 도움으로 어렵사리 얻은 노란 집에서 예술가공동체를 꿈꾸며 프로방스의 태양과 함께
예술 혼을 불태웠다. 남프랑스의 작고 허름한 도시 아흘은 그를 매료시키기에 충분한 곳이었고,
그는 이곳에서 무려 2백여 점의 그림을 그렸다. 아흘은 그의 화가 인생에서 가장 왕성한 활동을
한 곳이었고, 그의 인생을 불행의 구렁텅이로 빠트린 곳이었다.
반 고흐는 고갱과의 갈등, 팔리지 않는 그림으로 인한 경제적인 압박으로 힘들어하다가 결국
자신의 귀를 잘랐고, 아흘의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신세가 된다.
그러나 고흐는 병원에서도 꾸준히 그림을 그렸고 ‘아흘병원의 정원’이라는 작품을 남겼다.
한때 정신병원이었던 반 고흐 에스빠스는 지금은 아흘의 종합문화센터다.
고흐의 그림과 똑같은 ‘고흐의 정원’을 중심으로 빙 둘러선 건물에는 도서관과 영상자료관,
번역학교, 전시관 등이 있다. 봄꽃이 만발한 정원은 화려하기보다 소박한 느낌이다.
여기저기서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고 있다. 고흐의 정원을 담아가려는 것 같다. 우리도 그들 틈으로
들어가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그리고 반 고흐 에스빠스 1층에 있는 기념품 가게를 어슬렁거린다.
가게에는 반 고흐의 그림 판넬과 엽서들이 잔뜩 보인다. 나는 반 고흐의 ‘밤의 카페 테라스’ 그림 판넬을
하나 산다. 그림을 볼 때마다 오늘 선배들과 함께 한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를 것 같다.
반 고흐 에스빠스를 나온 우리는 이제 느긋해진다. 이만하면 아흘 산책을 충분하게 즐겼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아흘 완전정복을 한 건 아니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아흘을 만난 것 같다. 반 고흐가 살았던 노란 집은
1944년 이차대전 중에 폭격으로 파괴됐다니 굳이 가 볼 필요 없을 것 같고, 반 고흐가 그림을 그리러
자주 다녔다는 로마시대 공동묘지 알리스캉과 고흐의 도개교는 너무 멀리 있다.
나는 이쯤에서 산책을 끝낼 것인가를 망설이며 시외버스터미널을 확인해본다.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려면
버스를 타는 곳과 시간을 미리 알아두어야 한다. 다행히 버스터미널은 반 고흐 에스빠스에서 멀지 않았다.
골목길을 지나 바로 큰 길로 나가자마자 버스터미널이 보인다. 엑스로 가는 시외버스를 타는 곳과
버스시간까지 완벽하게 확인이 끝났다. 이제 버스만 타면 무사히 엑스로 돌아갈 수 있다. ㅎㅎㅎ
근처 골목길을 더 돌아볼까요? 아직 아흘을 떠나기 아쉬운 내가 선배들의 의향을 살핀다.
선배들의 대답은 ‘노’. 이만하면 충분하게 아흘 산책을 한 것 같다면서 버스나 기다리잖다.
아흘의 태양아래서 지친 다리를 주무르는 선배들이 조금 피곤해 보인다.
아흘 가는 방법
*엑스에서 -->아흘로 가는 버스시간표
6:00/ 6:50/7:55/10:00/14:00/16:35/17:20/18:15
*아흘에서-->엑스로 가는 버스시간표
6:15/7:25/8:40/12:30/14:50/16:40/18:55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버스시간표는 변동이 많다. 터미널에 문의를 하는 것이 좋다.>
*비행기로 도착하는 경우라면... /공항에서 아흘로 가는 리무진이 있다.
1.막세이유프로방스 공항에 내린다.
Aeroport Marseille Provence 13727 Marignane
http://www.marseille.aeroport.fr/
2.몽플리에 공항에 내린다. Aeroport Montpellier Mediterranee 34130 Mauguio
-www.montpellier.aeroport.fr
3.아비뇽공항에 내린다. Aeroport Avignon :84140 Montfavet
- http://www.avignon.aeroport.fr/
4.님 공항에 내린다. Aeroport Nimes Garons 30128 Garons
Tel. 04 66 70 49 49
*기차로 도착하는 경우라면... Gare SNCF
- http://www.sncf.fr에서 시간표와 요금을 확인, 또는 예약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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